도량석처럼 사는 산스님_왕모산 삼소굴 운산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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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석처럼 사는 산스님_왕모산 삼소굴 운산 스님
  • 최호승
  • 승인 2021.08.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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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광초대석 | 산에 들에 살어리랏다

언제부터였을까? 묘한 인연이었다. 스님을 꿈꿨고, 출가하고 싶었고, 고독이 좋았다. 한때 미대 진학을 원하던 소년은 스님만 그리기 시작했고, 목각으로 스님을 새기고 있었다. 교과서와 친해지기는 어려웠지만, 스님 이야기 나오는 책은 선뜻 구해 읽었다.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마련한 용돈은 불교용품 사는 데 썼다. 염주를 몸에 지니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부여 고란사에 오르면 잔잔히 퍼져나오는 향냄새도 그렇게 좋았다. 

소년의 머릿속은 온통 스님 생각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출가할 수 있을까.’ ‘스님들은 어떻게 살까?’ 옛 절터를 찾아가 털썩 주저앉아 상념에 젖었고, 자율학습 시간에 훌쩍 나와 올라간 절에서 스님들 그림자를 눈에 담기도 했다. 

그렇게 출가 인연이 무르익을 즈음, 소년은 우연히 한 스님을 뵀다. 스님은 된장 두 숟갈을 물에 풀고 시래기를 가위로 듬성듬성 썰어 넣고 끓인 된장국에 밥 한 공기를 후루룩 먹었다. 소년은 눈물이 날 정도로 신심이 일어났다. ‘저런 간소함이 배인 수행자의 모습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봉화 청량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던 소년은 해인사, 길상사를 거쳐 안동에 자리했다. IT 강국 한국에서 스마트폰을 먹통으로 만드는 왕모산에 암자 하나 짓고 정진 중이다. 소년은 이제 이렇게 불리고 있다. 안동 왕모산 삼소굴(三笑窟)의 ‘백구와 산스님’. 삼소굴에서 운산 스님과 한나절을 함께 보냈다. 

손재주 남다른 ‘태양의 남자’ 

삼소굴로 향하는 길은 좁고 질척였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고 빗물에 젖어 미끄러운 흙길을 올랐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중 나온 운산 스님 덕에 가까스로 암자에 올랐다. 스마트폰 안테나는 가물거리다 안녕을 고했다. 먼 길 나선 손님이 행여 길을 잘못 들까 염려한 스님의 얼굴엔 잔뜩 걱정이 서려 있었다. 백구 ‘똘이’가 스님 얼굴을 핥자 그제야 스님이 웃는다. “네가 내 얼굴을 만드는구나. 하하하.” 

함께 웃다가도 스님의 손이 신경 쓰였다. 자꾸 시선이 머물렀다. 검은 손톱 중 몇 개는 깨져있었고, 피부는 태양에 그을려 억세 보였다. 사실 모든 이야기가 여기 담겼다. 2012년 봄, 스님은 지금의 삼소굴 터에 자리를 잡았다. 인연 있던 도반이 소개해 준 이 자리를 처음 본 스님은 한눈에 반했단다. 

“집도 마당도 텅 비어 있었고, 산짐승 발자국 천지더라고요. 밤이 됐는데도 앞을 보니 마음이 확 터졌어요. 봉우리가 나(이곳)를 중심으로 앞에 펼쳐져 있었죠. 말 그대로 꽂혔죠. 내 인연 자리다, 죽어도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땅 한 평도 내 집도 없지만, 단 하루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스님은 직접 마당의 땅을 고르고, 황소바람이 들이치는 집 벽에 흙을 발랐다. 마당 한쪽의 쉼터 오두막도, 참선방 삼소굴도 손수 짓고 현판을 만들어 달았다. 600m 떨어진 계곡에서 석간수를 끌어왔고, 임야도 개간했다. 스님에 따르면 한때는 6,000평 정도 일궜고, 지금은 500평 정도 밤낮으로 관리한단다. 목화, 고추, 들깨, 더덕, 오이, 참외, 수박, 마늘 등 온갖 작물을 재배한다. 특히 수확한 목화로 솜이불, 옷, 좌복을 스님 손으로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다. 된장, 고추장 등 여러 장류도 담가 마당 앞 독에 보관해뒀다. 나열하는 것도 숨찰 정도로 종일 바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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