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실사구시, 영혼에 새긴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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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실사구시, 영혼에 새긴 가르침
  • 허홍범
  • 승인 2021.07.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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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원·옹방강과의 만남
이한복 임모(모사), 「증추사동귀도시(추사전별연도)」(전체), 1940, 과천시 추사박물관 소장.

1809년 연행이 가지는 의미

청년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꿈에도 그리던 북경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린 것은 1809년 12월 24일이었다. 동지부사인 생부 김노경의 자제군관으로 사행하러 간 것이다. 연행(燕行, 북경 체험) 노정 중 40일간의 북경 일정을 마치고 조선을 향해 말에 오른 것은 다음 해 2월 3일이었다. 김정희는 자신의 학예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말에 올랐을 것이다. 북경 학계의 거두 옹방강(翁方綱, 1733~1818)과 완원(阮元, 1764~1849) 두 경사(經師)와의 만남은 김정희와 19세기 조선문화에 무엇을 남겼는가?

24세 청년 김정희가 맞이한 겨울 한복판, 그는 연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대선배 연암 박지원이 ‘호곡장(好哭場, 울기 좋은 곳)’이라고 노래한 요동들판을 두고 시 「요동들판(遼野)」을 읊었다.

“천추의 커다란 울음터라니 재미난 그 비유 신묘도 하여라(千秋大哭場, 戲喩仍妙詮).” 

청년 김정희의 새로운 학문에 대한 포부와 기대는 일거에 선배 연암과 북학파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흔히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은 18세기 후반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을 시작으로 유득공(柳得恭, 1748~1807), 박제가(朴齊家, 1750~1805)를 손꼽을 수 있다. 연행이 18세기 후반 새로운 문화 창구로 주목받으며, 이제 이들의 뒤를 이어 김정희는 연행을 통해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예(學藝)의 길을 열었다. 

아마도 그 출발점은 추사의 연행을 통한 고증학의 자기화, 조선화의 과제를 안고 있었다고 하겠다. 

근대 문장가 변영만(1889~1954)은 “우리나라의 문장은 연암에게서 망했고, 시는 자하에게서 망했고, 글씨는 추사에게서 망했다”고 간명하게 표현한 바 있다. 18~19세기 세 명의 뛰어난 성취가 후학들이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희의 삶에서 20대 초중반 40일간의 북경 체험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삶에 남긴 자취는 무엇이고, 거기서 제기된 과제를 어떻게 뛰어넘었는가.

완원과 만남 그리고 조선 금석학 연구

북경 체험을 통한 고증학의 조선적 수용은 추사에게 서예사와 필법 연구를 통한 추사체 창출과 조선 금석학 연구의 빛나는 성과로 남았다. ‘내 글씨를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진 예술가형의 인간 김정희. 그는 남북으로 두 번의 유배를 다녀오고 정치적인 부침과 굴곡을 경험하면서 결국, 자신의 길을 갈고 닦아 예술로 승화했으며, 그것이 추사체이자 추사 금석학이라 하겠다.

운대(雲臺) 완원은 연경의 내로라 하던 학자로 청조문화 완성의 절대적 공로자이기도 했다. 『황청경해(黃淸經解)』는 청대 학자 79명이 쓴 188종, 1408권에 달하는 총서이다. 청대 고증학의 정수로 평가되는 『황청경해』의 편집자가 바로 완원이었다. 1829년 이 총서가 완성되자, 3년 후 추사에게 전해졌다. 김정희의 당호 완당(阮堂)은 완원을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은 김정희의 대표적인 당호로 사용됐다. 

완원은 본래 강남의 항주(杭州)에 있었는데, 때마침 일이 있어 연경에 올라와 후실(後室)인 공씨(孔氏) 집안의 저택[衍聖公邸]에 잠시 머물고 있었다. 완원은 일찍부터 조선 학자에 호감이 있었다. 유득공이 박제가와 함께 연경에 갔을 때 완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유득공은 43세, 완원은 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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