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불교에 뿌리 둔 타고난 금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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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불교에 뿌리 둔 타고난 금수저
  • 노승대
  • 승인 2021.07.27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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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과 화암사
추사고택. 하늘에서 보면 ‘ㅁ’자 형태의 안채, ‘ㄱ’자 형태의 사랑채를 확연히 확인할 수 있다. 

화순옹주와 정순왕후

영조 8년(1732) 11월, 조선 왕실에 큰 경사가 생겼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혼인하게 된 것이다. 영조에게 있어서는 첫 번째로 맞는 자식의 결혼이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연잉군 시절, 정실부인이었던 서씨에게서는 아이가 없었고, 첩실이었던 이씨에게서만 1남 2녀가 있었다. 첫 딸은 일찍 죽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실부인 서씨는 정성왕후가 되었지만, 첩실 이씨는 영조 즉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정빈 이씨로 봉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정빈 이씨 소생인 효장세자도 영조 4년(1728)에 죽었기 때문에 영조가 잠저(즉위 전 거주하던 사저)에 살 때 낳은 자식은 화순옹주 한 명만 남게 되었다. 화순옹주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 때 오빠인 효장세자도 죽어 외롭게 성장했다. 자연히 화순옹주를 향한 영조의 사랑은 애틋하고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사윗감을 얻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 영조는 품행이 방정하다(바르고 점잖다)고 알려진 김한신(1720~1758)을 사위로 맞았다. 김한신은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경주 김씨 문중 김흥경의 넷째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모도 준수했는데 결혼 후에도 항상 겸손하고 검소한 데다 시문에도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으며, 영조는 이 부부를 위해 통의동에 집을 마련해줬고, 사람들은 월성위궁이라고 불렀다. 정원에는 백송이 한 그루 있었다. 예산 내포 지역에 땅을 하사하고 집도 한 채 지어 주었다. 바로 널리 알려진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부조해 53칸짜리 저택으로 지었다. 한양의 장인들을 불러 지었기에 안채는 충청도 지방에서 흔하지 않은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지금은 ‘ㄱ’자 형태의 사랑채와 안채, 추사영당, 대문만 남아있지만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담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려는 영조의 사위 부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실의 사위는 명예직 외 관직에는 나아갈 수 없는 제도가 있었기에, 땅도 집도 하사한 셈이다. 추사도 이 집에서 태어났고 그의 이름이 일세를 풍미했기에 추사고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김한신은 자손도 없이 39세에 병으로 요절했다. 화순옹주의 억장도 무너졌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오빠를 잃고 13세 때 동갑이던 김한신과 결혼해 아이도 없이 26년을 의지해 살아왔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을 따라 죽기를 결심하고 일주일을 굶자 영조가 찾아와 먹을 것을 명했다. 화순옹주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음식을 입에 넣기는 했지만, 곧 토해냈다. 영조는 딸이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쓸쓸히 돌아갔고, 화순옹주는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라갔다. 조선 왕실 유일의 열녀였다. 

신하들이 열녀문 내려주기를 청했지만, 영조는 ‘아비의 말을 듣지 않았고 아버지가 딸의 열녀문을 세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결국, 정조대에 이르러 열녀문이 내려졌고 이 열녀문은 지금 김한신 부부 합장묘 재실 대문 앞에 세워져 있다. 

두 부부가 죽은 다음 해인 1759년 6월, 영조는 경주 김씨 문중에서 두 번째 왕비를 맞게 된다. 첫 번째 정비인 정성왕후가 먼저 죽어 삼년상이 끝났기 때문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 66세, 새로 맞은 정순왕후의 나이는 15세였다. 나이 차이는 무려 51세. 영조는 후궁 중에서 정비를 뽑지 않고 궁궐 밖에서 왕비를 간택했다. 숙종(영조의 아버지)이 후궁들 싸움으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일을 경계해 후궁이 왕비가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아버린 탓이다. 

이처럼 영조 재위 시절에 왕실과 두 번의 혼인을 맺으며 막강한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 세력이 된 경주 김씨 문중은 어디에 근거지를 둔 집안일까? 경주 김씨 문중은 대개 신라 경순왕의 자손들로 그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전국으로 분파돼 나갔다. 추사에게 증조부가 되는 김한신은 원래 해미 한다리 경주 김씨 문중 출신이다. 서산에서 해미로 가려면 용두천에 놓인 큰 다리를 건어야 했고 이를 ‘한다리’라고 불렀다. 인근에 경주 김씨 동적 마을이 있어 ‘한다리 경주 김씨’라고 불린다. 

이 문중의 선조는 상촌 김자수(1351~1413)로 경주 김씨 태사공파 후손이며, 안동이 오랜 세거지(世居地, 대대로 사는 고장)였다.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 건국 후 안동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태조가 형조판서로 부임하라는 전갈을 받고 상경하다가 정몽주묘 인근에서 자결하였다 한다. 고려 충신을 모시는 두문동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사림파로 있다가 차츰 출사하게 되었으며 1세기 중반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한 탓에 분묘도 경기도 광주, 시흥, 고양에 흩어져 있다. 

김자수의 6세손 김연(1494~?)은 무과 출신으로 지리학에 밝아 서산 한다리에 정착,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가 되었다. 김연의 손자 김적(1564~1646) 때에는 집안의 비축 곡식이 수천 석에 이를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 김적은 네 아들을 뒀는데, 막내 학주 김홍욱(1602~1654)의 후손들이 가문을 크게 일으켜 정승 8명과 왕비 1명을 배출하게 되니 처음으로 영의정에 오른 이가 바로 김한신의 부친 김흥경이다. 추사도 바로 이 가계의 후손이다. 

곧 김한신과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는 8촌 형제간이고, 정순왕후는 추사에게 집안 할머니뻘이 된다.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위상이나 왕실과의 혼맥, 선대로부터 내려온 뛰어난 자질로 추사는 아무 어려움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타고난 금수저였던 셈이다.

내포와 추사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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