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신화] 붓다는 왜 신통(神通)을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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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신화] 붓다는 왜 신통(神通)을 보였을까?
  • 동명 스님
  • 승인 2021.08.2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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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바스티(사왓티)에 있는, 붓다가 쌍신변 신통술을 펼친 곳에 세워진 스투파. 

신통 부림을 금한 붓다

신통력(神通力)은 일반적인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특별한 능력이다. 어느 종교이건 교주의 신통력을 강조하지 않은 경우는 없을 것이다. 불교는 신통력에 의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신통력에 관한 이야기가 의외로 많다. 다만 신통을 다른 종교처럼 강조하지는 않는 편이다. 불교가 신통을 강조하지 않는 것은 붓다가 제자들의 신통을 금지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신의 은총이나 구원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편안케 하는 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붓다가 제자들의 신통력 발휘를 금했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자. 

라자가하의 한 부자가 갠지스강에 물놀이 갔다가 우연히 아주 귀한 붉은 전단향 나무를 얻게 되었다. 그는 그 전단향 나무로 발우를 만들었다. 참으로 고급스러운 발우를 보며 부자는 이 발우를 통해 진정으로 신통자재한 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키가 엄청나게 큰 대나무 꼭대기에 발우를 매달아놓고 널리 알렸다.

“신통자재한 이가 날아올라서 저 발우를 가져가십시오.”

이에 내로라하는 수행자들이 발우가 욕심나서라기보다는 신통력 1위를 빼앗길 수 없다는 생각에 부자의 집을 찾았다.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 숙명론자 막칼리 고살라, 단멸론자이자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린, 불멸론자 빠꾸다 깟짜야나, 회의론자 산자야 벨랏티뿟따가 도전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다섯 명의 대가들이 발우를 갖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자이나교의 니간타 나따뿟따는 신통에는 자신이 없어서 계책을 써서 발우를 차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뛰어오를 테니 너희들은 나를 붙잡고 ‘스승님, 그까짓 사소한 발우 하나를 위해 군중 앞에서 숨은 능력을 드러내야겠습니까?’라며 나를 바닥에 쓰러뜨리도록 해라.”

니간타 나따뿟따는 부자의 집에 가서 작전대로 했으나 부자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존자님, 직접 날아올라서 발우를 내려오시면 발우 이상을 드리겠습니다.”

목갈라나(목건련) 장로와 삔돌라 바라드와자 장로가 탁발을 나갔다가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부자가 전단향 발우를 큰 대나무 꼭대기에 매달아놓고는 세간에 도인(道人) 행세하는 사람 중에서 자신 있으신 분이 날아올라서 발우를 가져가라고 했다는구먼. 그런데 글쎄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대. 그러고 보면 이 세상에 도인은 한 명도 없을지도 몰라.”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사람들이 도인이란 ‘신통력이 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통제일인 목갈라나가 신통력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은데, 진정한 고수는 함부로 나서지 않는다. 삔돌라가 목갈라나에게 “신통제일이신 존자님께서 발우를 가지시는 게 마땅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지만, 목갈라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삔돌라 스님, 당신도 아라한이니 한번 해보시지요.”

삔돌라 스님은 즉시 사선정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둘레가 3요자나(1요자나는 약 12~14km로 소달구지가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인 엄청나게 큰 바위를 가볍게 들어 올리고는 그 바위 위에 앉아 라자가하를 일곱 바퀴 돌았다. 엄청나게 큰 바위가 공중에서 구름처럼 움직이는 것을 본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라자가하의 둘레가 3요자나였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 바위가 떨어지면 우리 도시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 거야.”

사람들은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삔돌라 스님이 바위를 제자리로 보내고는 사뿐히 내려오자, 부자가 발우를 내려 네 가지 음식을 가득 담은 후 스님에게 올렸다.

이 소식이 붓다에게 전해지자 붓다가 삔돌라 스님을 꾸짖고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비구들이여, 재가자들에게 신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재가자들에게 신통을 보여주는 자는 계율을 범하는 것이다. 이 전단향 발우는 깨뜨려서 향으로 사용하도록 하여라. 앞으로 나무 발우는 사용하지 말라.”

‘간다의 망고나무’ 아래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붓다는 왜 제자들에게 신통을 부리는 것을 금했을까? 신통이 마음을 궁극적으로 평화롭게 하는 데, 곧 열반으로 가는 길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또 불교에 입문한 대중들이 신통술에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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