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의 과거시험(僧科), 환속하면 관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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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과거시험(僧科), 환속하면 관료로
  • 김남수
  • 승인 2021.07.12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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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조선 시대 스님으로 산다는 것은
② 스님들의 과거 시험, 환속하면 관료로*
③ 14만 명에 이르는 또 다른 스님들
④ 스님들의 신분이 8천이라고? 오해를 넘어서

양혜원 연구원이 ‘조선 시대의 승(僧)’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썼던 계기는 우연하다. 

사회 경제사를 공부하고 있었는데, 조선 시대 지리지를 보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지역의 사찰 숫자가 증가 추세를 보이는 곳이 있고, 그곳이 특이하게 유림이 강세를 보이는 경상북도 안동’이었단다.

‘경상도 특히 안동 지역은 유림의 고향인데, 이상하다? 왜 이러지?’ 이런 고민이 있었고, 그러다 「영가지(永嘉誌)」를 손에 쥐게 되었다. 

「영가지(永嘉誌)」 사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유림의 고향 안동에 절이 100개가 넘고, 운영되고 있는 사찰이 70개에 이르렀단다. 이를 주제로 석사 학위를 쓰고, 쭈~욱 불교 관련 주제로 박사 학위까지 쓰게 되었단다. 

지난 기사는 조선 시대 출가한 승려가 받게 되는 도첩을 주제로 하였다. 이제 왕의 윤허까지 받은 양반 자제 출신으로 도첩을 받은 승려는 이후 어떠한 과정을 겪게 되었는가를 주제로 한다.

 

▶ 양반 자제로서 왕의 윤허를 받고 정전을 납부하여 도첩을 받았어요. 다음에는 어떻게 되나요?  

도첩(度牒)을 받은 다음에는 군역을 비롯한 역에서 빠지고 수행의 길을 가시겠죠?(웃음)

현실적으로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자가 도첩을 받아서 출가했다’라는 것은 신실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고려 말까지의 사료를 봐도 좋은 집안에서는 아들이 있으면 두 가지 직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하나는 세속 관료의 길을 걷게 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출가를 시켜서 승관(僧官)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이 많은 집 같은 경우에는 세속의 관료와 출가자가 동시에 나와요. 그러면 아~이거 좀 괜찮은 집, 그런 평가를 받게 되거든요.

이런 기록은 고려 말까지 너무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첩을 받은 사람들은 아마 승과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고, 승과를 준비해서 시험을 보고 승계(僧階)를 받고 승직(僧職)을 받고 그런 다음에 주지직을 역임하고 하죠. 

주지직이라는 것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역시 임명직이에요. 국가에서 임명하는 직이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스님들의 과거 시험, 선시(승과)

선시를 이른바 우리가 승과(僧科)라고 얘기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승과라는 용어는 16세기에나 가서 나오고 원래는 선시(選試) 선불장(選佛場) 시선(試選) 이런 식의 용어로 쓰여요. 

과거 시험이 세속의 관리를 뽑는 것이라면 선시는 불교 교단 내의 승려 관리를 뽑는 것이라고 봐야겠죠. 과거 시험하고는 완전 별개의 시험입니다. 

선시 절차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선시 절차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선시를 볼 때 시험이 여러 단계로 나누어집니다. 

사실 어디까지를 선시로 보아야 하는가가 문제가 좀 있긴 한데, 처음에 승려가 되려고 할 때 도첩을 받는 것과 선시를 받는 것을 헷갈려 하거든요? 헷갈리면 안 되는 문제이고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과정들을 잘 살펴보면, 이 시기 승직자 내지는 승려들을 굉장히 엘리트 취급을 했다는 느낌이 옵니다.

‘출가할 때 재행을 시험한다’라고 경제육전에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경국대전에 가면 그 과목이 명확해져요. 심경, 금강경, 살달타. 이 세 가지를 암송하게 만들어 암송하고 나서 양인이면서 경제력이 되는 사람을 뽑거든요.

 그것은 처음에 도첩을 받을 때 시험을 한번 보는 거잖아요? 

이렇게 해서 도첩을 받아야 기본적으로 선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깁니다.

 

몇 명이나 뽑았을까?

조선 초기에 몇 명이나 뽑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충 유추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종파 통폐합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11종에서 7종이 되었다가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가지 않습니까? 11종, 12종이라고 얘기를 하지만 11종이라고 보았을 때, 초선에서 적게는 4~50명, 많게는 78명에서 80명 이렇게 뽑았다고 합니다.  쉽게 계산하여 종파가 11개이기에 전체로는 수백명 수준에 이르게됩니다. 

최종 시험에서 초선에 합격한 사람 중 절반에서 3분의 1 정도 뽑았다고 하면 마지막에 승직을 받는 사람도 몇백 명 범주가 되는 거죠. 

이것은 말도 안 되게 많은 수치에요. 만약에 그렇게 많이 줬으면 그게 다 실제적인 직위를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죠.

공무원 적채 현상처럼 잔뜩 받은 다음에 주지에 임명되지 못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고, 다만 명예로서 그렇게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국대전' 도승 및 선시 절차
'경국대전' 도승 및 선시 절차

나중에 세종이 종파 통폐합을 하면서 선교 양종으로 정하잖아요? 

양종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두고 논의가 분분하기는 하지만 국가 제도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명확해요. 불교가 내부에서 어떤 가르침을 어떻게 배우던 우리는 너네를 선과 교, 두 개로 나누어 관리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국가가 가르침을 통폐합하고 이럴 수는 없잖아요?

‘이제 너, 너, 너는 선으로 취급하고 너, 너, 너는 교로 취급하겠어’ 이렇게 나눕니다. 선시를 볼 때도 얘네들은 선종으로서 묶고, 얘네들을 교종으로 묶어서 합해서 인원을 뽑는 거예요.

경국대전 같은 경우에는 15세기 후반에 완성이 되는데 거기 승과의 최종 인원이 선교 각 30인 이렇게 되어 있어요. 

도승할 때 시험을 한번 보고, 초선을 볼 때 불교계 내에서 시험을 한번 보고 다음에 이제 그중에서 3분의 1 정도를 거르고 애들 가운데 최종자로 선발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경국대전 단계 즈음 가면 양종 합해서 60명 정도가 성립됩니다. 선종 30인, 교종 30인 합하여 60인입니다.

 

문무과 선발도 60명

(이전보다) 엄청나게 줄인 것처럼 보이죠? 실제로 준 것이 맞기도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봐~ 봐~. 조선 시대에 불교를 억압해서 몇백 명씩 뽑던 승관들을 30명씩 뽑아서 60명이 되었네'라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맞는데 이것을 과거 시험하고 비교해 보면 승려 관료가 많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세속의 관료가 많이 필요할까요? 인구수로 볼 때도 세속의 관료가 훨씬 많이 필요하겠죠?

그런데 세속도 최종 합격자가 문무 약 30명씩이에요. 선교 양종 30명도 아마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숫자를 정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불교계 내에서 봤을 때 종파가 난립했던 때에 비해서 숫자가 적어진 건 맞지만, 이 숫자가 그냥 마냥 적고 이것이 억불이어서 그렇다고 보기는 조금 힘든 면이 있습니다.

양혜원(서울대 규장각학국학연구원)
인터뷰를 하고 있는 양혜원 연구원

▶ 이 분들이 선시에 합격했다면 사실 관료로 보는 게 맞는 거죠? 

불교계 내에서 주지 같은 승직을 받은 자가 되는 거죠. 승과를 보고 합격하여 승계와 승관직, 즉 승직을 받으면 그 사람은 국가가 뽑은 승려 관리인 거예요. 

승려 관리이기에 세속의 일은 터치할 수 없지만, 교단 내의 사무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일종의 행정 실무자들이라고 볼 수 있고 대표적인 직이 주지직입니다. 주지직은 성격상 고려 시대 이래 관료와 비슷한 직이에요. 왕명을 받고 파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경국대전에도 보면 주지직은 30개월 만에 교체하고 교체할 때 ‘이 사람이 담당했던 절의 재산들을 전부 다 목록을 봐 가지고 인수인계를 하고, 없어진 거 있으면 물어내게 해라’ 이런 게 법전에 다 들어가 있어요. 그런 직위들은 국가 관료직과 유사한, 국가에서 교단을 관리하기 위해 선발한 국가 관료라고 보는 게 맞죠.

 

▶ 스님들이 승과에 합격해서 품계를 받고 승려 관료가 되었습니다. 과거시험에 합격했던 양반과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 대우를 받았을까요? 

세속의 관료와 비교해서 어느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명확하게 비교할 수 있는 자료는 없어요. 

경제육전 단계, 조선 초기 15세기 한 중반 정도까지는 관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승 할 때 시험을 보고 다음에 승과를 볼 때도 1차 아니라 1, 2, 3차로 나누어져 가지고 계속해서 걸러내고 있거든요.

15세기를 거치면서 애초에 500명, 700명 이렇게 뽑던 것을 60명으로 확 줄였으니까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해진 거예요.

그래서 승직을 받은 자들이 엘리트라고 치부되었던 것은 맞았던 거 같아요. 이 사람들은 그래도 역량이 있는 자들, 신분 필터도 거친 자들이라는 인식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전결과 노비도 받아

초기 실록 자료를 보면 판사 이하 선사 이상은 전결과 노비 15구를 주고 중덕 이하 대선 이상은 노비 10구이고 이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수치를 보면 세속 관료에 비하면 굉장히 낮은 금액이에요.

노비나 전결의 기준으로 봤을 때 승직자 개개인에게 나가는 양이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국가에서 나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승직에 있는 스님들에게 노비를 준다는 실록의 기록

문제는 뭐냐면, 이런 점도 고려해서 봐야 합니다.

태종 때 사찰을 242개로 줄였다고 나옵니다. 물리적으로 사찰을 깨부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찰을 242개로 줄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종대에 36개까지 줄이게 됩니다. 

후대에 사관들이 ‘태종의 업적으로 제일 잘했다’라고 꼽는 것 중 하나가 242개로 줄인 거예요. 

그리고 이것은 예전에 비해 10분의 1로 줄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태종이 242개로 줄이기 전에는 거의 한 2,424개 사찰, 넉넉하게 2,500개 사찰의 운영 비용을 국가에서 준 거예요.

고려 시대 후반이나 조선 초기 같은 경우에 큰절들은 거기 사는 대중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 사람들 먹을 거, 입을 거, 공부하고 거기서 뭐 경작하고 뭐 불사하고 이런 것들의 비용을 국가에서 다 준다고 했을 때 2,500개의 절에다 그 비용을 주는 게 만만치가 않거든요.

그러다가 10분의 1로 줄고 나중에 36개, 40개 내외 정도까지 줄어들게 됩니다. 40개 내외로 조정이 될 때는 방향이 바뀝니다. 대표적인 사찰들, 커다란 사찰들만 남겨 놓는 대신에 그 사찰들에 비용을 엄청나게 많이 줍니다.

전체 국가에서 내려가는 비용은 전체적으로 줄이되, 주어야 할 사찰에는 크게 크게 내려 주는 거예요. 그 정해진 사찰의 주지로 파견된다? 그런 것은 엄청난 이득이에요. 

절에서 승려들에게 내리는 노비나 재산, 전결 같은 것은 우리가 시주품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아요? 이렇게 가는 것은 시주가 아니에요.

전부 국가 재정이기 때문에 조선 초에 새로 들어온 관료한테 나눠줄 땅도 없어 문기를 불태우고 이러는 판에 사찰한테 이렇게 많은 비용을 줄 수가 없거든요. 

그것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승관들이 받는 금액은 사실 그렇게 높은 금액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명을 하고 있는 양혜원 연구원

▶ 논문을 읽다 보면 재미있는 것이 승직에 있던 스님들이 환속하는 경우에요. 현대 시대와 다르게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만 아니라, 이분들에게 벼슬을 내렸어요?

고려 시대 승직자들은 완전 귀족층이고 지배층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초기 경우에는 경제육전에 아예 법 조항으로 올라가 있어요.

‘승직자가 환속하는 경우 그 사람의 승직에 준해서 관직을 준다’라고 되어 있어요. ‘초입사례(初入仕例)를 면한다’라고 되어 있거든요. ‘초입사례’라는 것은 관직에 나아 가는 첫 번째 시험이니까 과거 시험이거든요.

승직을 지냈던 사람은 승과도 보고 어느 정도 입증이 되었기에, 환속했을 때 이 사람이 관직으로 나가려고 하면 이 사람이 과거를 보지 않아도 승직에 지냈던 품계에 준해서 관직을 준다는 거죠. 그것이 법전에 수록되어 있어요.

15세기 후반에 성종 대에 가면 조선 시대 정치사로 봤을 때도 굉장히 변화가 많이 있는 시기이거든요. 

그 시기 즈음 가면 어떤 얘기가 나오냐면, 지방에서 어떤 환속자가 상소를 올립니다. 

‘내가 승직에 있을 때에 되게 높은 승직을 지냈는데 법전에 보면 승직에 준해 관직을 주게 되어 있는데 나한테 관직을 안 준다, 이럴 수가 있냐’ 이런 상소를 올려요.

예조에서 이것을 받은 다음에 난감하니까 ‘그러면 양종 판사한테 물어 이 정도 승직은 어느 정도 관직에 준하는지 알아봐라’. 그랬더니 불교계에서 세속의 관료에 사품(四品)의 높은 직위에 대응이 되어 있어요.

나중에 이것을 보고 받고 왕이 ‘이거 진짜야?’ 이렇게 물어봅니다. 물어보니까 밑에 있는 신하들이 난리가 난 거죠.

‘이거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은 택도 없습니다’ 그럽니다. 이게 성종 20년 내외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경국대전이 을사대전(乙巳大全) 체제로 완료된 것이 성종 16년이에요. 성종 16년의 경국대전을 보면 경제육전에 나와 있던 ‘환속한 승에게 승직에 준하는 관직을 주고 초입사례를 면해준다’는 내용이 빠져 있어요.

그 소장을 올린 사람은 예전의 경제육전의 법전을 들이밀면서 소장을 낸 거죠. 그전에는 이런 상소가 문제가 안 되다가 법전이 바뀌면서 문제가 되는 거잖아요?

‘이거 어떡하지? 어떡하지?’하고 물어보니까 왕도 난감해서 알아봤던 거거든요. 

 성종이 나중에 그것을 판단할 때 뭐라고 하냐면 ‘상소를 보니까 이건 다 예전 얘기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만든 우리 법전 보니까 그 얘기 다 빠져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주는 건 너무 심하니 그렇다고 안 줄 수도 없다. 그러니까 너는 요정도 그 당시에 적절한 상층의 양인들이 받을 수 있는 군직을 줘요. 

 ‘요 정도만 받고 그냥 물러나라’ 이렇게 해결을 하거든요. 그 기사 이후로는 환속 승에 대해 관직을 논하는 얘기가 더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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