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인간과 사물의 세심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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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인간과 사물의 세심한 만남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1.06.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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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베 마사오 개인전 '기억의 활주로: 숲의 섬에서 돌의 섬으로'전
오카베 마사오 작가.

일본 작가 오카베 마사오(Okabe Masao, 1942~)의 개인전이 오는 7월 15일부터 8월 4일까지 제주시에 있는 아트스페이스·씨에서 열린다. 50여 년간 프로타주 기법(Frottage, 문지른다는 뜻의 프랑스어 frotter에서 유래한 말로, 탁본과 유사한 표현 기법)으로 세계 여러 장소에 깃든 기억을 어루만져온 작가가 36년 만에 한국에서 가지는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강제노역으로 구축한 제주 알뜨르 비행장과 역시 조선인 강제노역 노동자들의 피땀이 서린 네무로 마키노우치 비행장에서 제작한 프로타주 작품들이 선보여질 예정이다. 전시의 책임기획자 안혜경 아트스페이스·씨 대표는 “장소에 밀착해 온몸으로 땀 흘리며 문지르고 기억을 드러내는 프로타주야말로, 감춰지거나 묻힌 오랜 기억에 관심을 가지고 드러내려는 작가의 창작 의도를 실행하는 탁월한 예술 매체”라며 오카베 작가의 작품으로 서로 마주 보게 된 두 구(舊) 해군 비행장이 어떠한 울림을 줄 수 있을지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 현장을 미리 다녀왔다.

 

역사라는 범주의 바깥에서

대상물에 종이를 밀착하여 떠내는 방식으로 제작하는 프로타주 기법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3차원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물을 2차원적 가상세계에 옮겨 담기 위한 속임수를 프로타주는 쓰지 않는다. 대상물은 화면에 담기기 위해 납작하게 압축될 필요도, 보기 좋게 확대·축소될 필요도 없다. 대신, 대상물은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당당한 행위소로서 종이 위에 제 살갗을 드러낸다. 우리가 ‘역사’라고, ‘제국주의의 상흔’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써 가려버렸는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간직한 채. 만물이 공(空)하다면, 인간이 붙이는 개념과 사물 사이의 간극이 절대로 없어질 수 없다면, 작가의 프로타주에 살갗을 드러낸 격납고는 그 간극 어딘가에서 인간의 언어가 아닌 그 자신의 언어로(어쩌면 우리는 절대로 독해하지 못할) 소리칠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장소에 ‘대한(about)’ 작업이 아닌 장소에 ‘의한(by)’ 작업을 만들어낸다. 이번 전시에 평론을 맡은 김항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프로타주는 그 기억을 거창한 생태주의나 환경보호의 이념으로 서사화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오카베 작가의 프로타주는 “목적으로 수렴되는 역사의 상상력을 지나온 과거를 순간으로 분산시키며 (중략) 국가 공인의 공식 기억에 균열을 낸다”고 썼다.

인간과 사물의 평등한 만남

결국, 인간도 물질이 아닌가. 광물학자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는 인류를 “무기질이 두드러지게 강력하게 혼합된 형태”, “걷고 말하는 무기질”이라 불렀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역시 “인류는 복잡한 물질 체계로 여겨진다. 인간의 의식은 언어의 효과로, 언어 역시 매우 복잡한 물질 체계다”라고 했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55~56쪽 발췌) 그런데도 우리는 쉽사리 인간을 존재론적 중심 혹은 세계를 구성하는 위계적 구조의 꼭대기에 놓으며 인간 아닌 물질들을 대상화한다. 인간이 지은 세계에 완전히 용해되기를 거부하는 일종의 생명력 같은 것이 작가의 손과 흑연을 통해 도화지 위에 스캔된다. 이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위대한 인간종으로서 사물을 장악하는 행위가 아니다. 프로타주로 스캔한 사물의 표면은 그저 그 자체로서, 즉 (인간) 주체가 그것들에 부여하는 맥락이나 기호로 온전히 환원될 수 없는 생생한 실체로서 드러나며, 인간의 물질성과 사물의 물질성 사이의 평등한 만남을 이루어낸다.

우리의 과거를 위한 현재는 있는가?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아무리 전시를 잘 꾸며도, 전시를 보러 오는 관객들과 마음으로 연결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해 이번 전시는 시민들이 직접 프로타주를 제작해보는 워크숍을 연계 프로그램으로 두었다. 워크숍이 진행된 장소는 알뜨르 비행장과 강정마을 해군기지 앞이었다. 알뜨르 비행장과 네무로의 마키노우치 비행장이 지금은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적 장소라면, 세계 최대 연성 산호 서식지로 절대보전지역이었던 서귀포시 강정동 바다의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고 준공한 해군기지는 현재적 장소였다. 협력기획자 박민희는 “작가와 관객을 구분 짓거나 작가가 일방적으로 발화하는 것이 아닌 동시대인으로서 서로가 공존하며 연결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암암리에 군사기지화 되는 제주도 곳곳에서” 좌지우지되는 우리의 미래, “결코 개인의 삶과 무관할 수 없”는 현재를 프로타주를 통해 만지고 느낄 수 있던 시간이었다고 밝혔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지각변동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경험하고,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질문으로 두텁게 하며, 무엇보다도 사물의 물질성을 인간의 물질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지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카베의 프로타주는 보여주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기획은 이러한 감각적 지각변동으로부터 시작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전시회를 관람하며 이 감동을 함께 느껴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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