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불교] 미륵의 삼회설법을 준비하다
상태바
[백제 불교] 미륵의 삼회설법을 준비하다
  • 이병호
  • 승인 2021.06.29 15: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집 드높고 은미한 이름 백제 불교 | 대지에 잠든 불국정토의 꿈
왕흥사지 와편.

백제에서 불교를 처음 수용한 것은 384년 침류왕 때 일이지만 불교의 비중이 커지고 사찰이 본격적으로 조영(造營, 집 따위를 지음)된 것은 성왕(재위 523~554년) 치세 때부터이다. 백제 성왕은 538년 사비(지금의 부여)로 천도를 단행한 다음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중국의 역사책인 『주서(周書)』 백제전에는 이를 “스님과 비구니, 사원과 불탑이 매우 많다[僧尼寺塔甚多]”고 표현했는데 부여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서는 20여 개소에 달하는 백제 절터가 확인되기도 했다. 부여 정림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는 1,300여 년을 버텨 온 백제 때 만든 석탑이 지금도 당당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는 성왕이 마련한 불교 치국책을 토대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를 확립했고, 이를 다시 주변의 신라나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동아시아 불교 문화의 확산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함으로써 대다수 사찰이 불타 없어져 버렸다. 다행히 최근 부여와 익산 지역 절터에 관한 발굴 조사가 활발하게 실시되면서 찬란했던 백제 불교의 진면목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도성의 한복판을 차지한 정림사지 

정림사지는 백제 사찰을 대표하는 곳으로 부여 시가지의 중심에 자리한다. 지금도 백제 때 만든 5층 석탑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1층에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자신의 전승기념문을 적은 명문이 남아 있다. 그로 인해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린 적도 있지만 고려시대 기와에 ‘정림사’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지금은 정림사지로 불리고 있다. 

정림사지는 3차례의 발굴 조사로 남에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이 일직선상에 세워지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감싸는 소위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곳에서는 백제 연화문수막새가 다량 수습되고 고려시대 이후에 속하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법등이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으로는 납석제삼존불이 있는데 그 조각 양식이 백제의 시대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 대·중·소형의 소조상이 다량 발견되었는데 일부 두상편에는 녹유(녹색 유약으로 중국 한나라 때 만들어짐)를 바른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소조상들은 창건기 목탑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정림사지는 사비 천도 직후에 새로운 도성의 랜드마크로 세워졌으며, 성왕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로 생각된다. 

정림사지의 창건 시기나 목탑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지만, 백제 멸망기에 당나라의 전승기념문이 5층 석탑에 새겨진 것은 이 사찰이 백제 당시에 매우 중요했음을 방증한다. 정림사지에서 확인된 일탑일금당식 가람 배치는 부여와 익산의 백제 절터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될 뿐 아니라 일본 오사카의 시텐노지(四天王寺)에서도 동일한 모습이 확인되어, 정림사지가 일본 고대 사찰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많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