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다른 나라에 불교를 전해준 나라로 흔히 기억되고 있다. 아무래도 신라와 일본에 탑을 세우고 불상을 보내 준 사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중국 유학을 다녀오기도 험난했던 6세기 중반 시절에, 겸익(謙益)이라는 스님을 보내 인도 불교를 직접 들여오기도 했다. 겸익 스님의 이야기는 ‘미륵불광사’라는 옛 절에서 전해졌다고 하므로, 백제 불교와 미륵신앙의 인연이 새삼 확인되고 있다. 또 지금 살펴볼 이야기들 역시 여러모로 ‘미륵’과 얽힌 것들이 많아서, 백제 불교의 핵심은 곧 미륵신앙에 있다고 할 만하다. 우리는 미륵을 미래불이라고도 한다. 태봉의 궁예 이래로 많은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이 자신을 미륵에 빗대거나, 힘겨운 민중이 미륵의 세상을 고대하기도 했다. 따라서 미륵이 한국인의 정신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런데 ‘창세가’ 같은 서사무가를 보면, 미륵은 미래가 아닌 과거와도 연결된다. 인간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한 신은 미륵이었는데, 석가와의 내기에서 속임수 탓에 승리를 도둑맞고 일단 물러났다는 것이다. 두 신이 서로 인간 세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이야기는 전 세계에 많이 있지만, 하필 신의 이름이 석가와 미륵이 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석가모니 부처님의 세상인 우리 현실에 왜 이렇게 악인과 악행들이 많은지 이유를 애써 찾느라 무리해서 석가를 악당으로 묘사했나 싶지만,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사라진 미륵이 곧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된 백제 불교와 문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곤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 불교가 이후 한국불교의 튼실한 뼈대가 된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백제 불교는 마치 사라진 미륵처럼 무의식적인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사진. 유동영
미시랑과 신라에 전해진 미륵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화랑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특히 세속오계의 임전무퇴 정신이 주목받아, 육군사관학교를 화랑대라 부르고 군가에도 ‘화랑의 핏줄’ 운운한다. 그런데 화랑은 원래 ‘원화(源花)’라는 이름으로,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여인을 따르던 단체였다. 그러다가 여인들끼리 서로 시기하여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여자 대신 남자를 우두머리로 삼는 화랑 제도로 개편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원화가 해체되고 화랑으로 대체되는 과정은 생략했는데, 『삼국유사』는 화랑이 다시 창단되고 미륵의 이미지를 얻기까지 백제 불교가 끼친 영향력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 흥륜사의 진자(眞慈) 스님은 미륵이 화랑으로 나타나 주기를 간절히 빈 끝에, ‘웅천’의 수원사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化)를 만나리라는 꿈을 꾼다. 여기서 ‘선(仙)’은 곧 화랑의 다른 표기이면서 그 우두머리를 뜻하는 국선(國仙)에 해당하므로, 미륵선화 자체가 화랑이 된 미륵이라는 뜻이다. 초면에는 미륵선화를 알아보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미시랑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만나 화랑 제도의 정착에 이바지했다. 7년이 지나 먼저 미시랑이 자취를 감추고, 진자 역시 만년에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삼국유사』는 미시랑 이름의 ‘시(尸)’는 ‘력(力)’과 그 모양이 통한다고 하여, 미시랑의 이름이 미력 곧 미륵과 상통한다고도 하였다.
진자와 미시랑이 처음 만난 ‘웅천’은 곧 백제의 둘째 수도였던 웅진이다. 『삼국사기』 여러 곳에서도 웅진을 웅천이라 표기했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좋지 않은데, 어떻게 이들이 국경을 넘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스님들이 불교 교류를 목적으로 국경을 넘는 경우는 삼국시대에 그리 드물지 않았다. 미시랑은 자신을 진자와 마찬가지로 신라 사람이라고도 했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굳이 국경을 넘어 만날 이유를 찾을 수 없으므로 아마 신라 사람이라는 말은 후대에 덧붙은 표현일 수도 있다. 설령 미시랑이 신라인이라 해도, 백제 땅에서 백제 미륵신앙을 배웠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백제 사람이었거나, 혹은 백제에서 미륵신앙을 배워 온 미시랑 덕분에 신라의 화랑은 미륵이라는 별칭을 지니게 되었다. 훗날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 곧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설법하는 나무 용화수의 이름을 붙여 높이는가 하면, 김유신과 함께 삼국을 통일했다는 향가 ‘모죽지랑가’의 죽지랑을 미륵의 화신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화랑의 정신에는 미시랑이 전해 준 백제 불교, 특히 미륵의 이름이 곳곳에 남게 되었다.
무왕과 설화 속 서동
무왕은 백제의 영웅이었다. ‘무(武)’라는 칭호 역시 신라와의 여러 차례 전쟁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의미이다. 무왕과 그 아들 의자왕이 신라를 크게 압박해서, 신라가 외교를 통해 활로를 찾은 끝에 나당 동맹에 이르게 되었다고 볼 정도이다. 그런데 무왕 역시 미륵신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서,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로 미륵사를 창건하였다. 근래에 미륵사 석탑의 복원을 위한 해체 과정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사택적덕이라는 좌평의 딸이었던 백제 왕후의 기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삼국유사』가 아무리 중요한들 백제 멸망 이후 수백 년이 지나서야 편찬된 것이므로, 백제인들이 직접 써서 미륵사 석탑에 공양한 이 기록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기록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유사』 설화 속 무왕의 어린 시절이었던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선화공주가 결국 가공인물이며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결국 거짓이라는 서글픈(?) 생각도 든다. 사실 무왕 시절 백제와 신라는 여러 번 전쟁도 하고 험악한 관계였으므로, 서동은 무왕이 아닌 다른 임금이 아닐까 하는 가설은 여러 차례 있었다. 신라 공주와 혼인한 백제왕이 확인되지 않은 탓에, 신라 귀족의 딸과 혼인한 동성왕을 대안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 인물이 아니라 할지라도, 서동과 선화공주는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곧 백제와 신라의 화합을 상징하며, 어쩌면 한국사의 한 비극인 영호남 사이의 지역 갈등을 반드시 해소해야 한다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의 실제 통합은 전쟁이라는 유혈 사태를 통해 이루어졌다. 어떤 민족이나 통합의 역사는 그래왔다고도 하겠지만, 백제와 신라의 서로를 향한 오랜 복수의 역사는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을 높이 평가하기 어려운 걸림돌 가운데 하나기도 했다. 그런 복수의 역사를 평범한 백제 총각이 아름다운 신라 공주와 혼인하고,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협력하여 미륵사라는 큰 절을 짓는 훈훈한 이야기로 씻어내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총체인 동시에, 백제와 신라가 피의 복수를 그치고 화해의 역사로 나아가려 했던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물론 지역감정이 불러온 갈등은 오늘날에도 거듭되고 있으므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이라고 무가치하지는 않다. 일제가 시멘트로 대충 때웠던 미륵사의 옛 자취가 더디게나마 차례로 복원되듯, 우리 사회의 여러 갈등도 서동과 선화공주의 마음처럼 아름답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미륵의 미래는 그런 갈등을 넘어선 화해가 아닐까?
소설 속 아사달과 역사 속 아비지
선화공주와 마찬가지로 가공인물이지만, 백제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현진건의 『무영탑』이라는 1938년 소설에 나오는 아사달이라는 석공이다. 석가탑의 그림자를 보고 싶어 했던 아사녀의 설화는 17세기부터 확인되지만, 해당 기록에서 무영탑을 만든 석공은 당나라 국적이었다. 아사달이라는 인물은 현진건의 창작이며, 아사녀와 부부로서 백제 출신이라는 것도 문학적 상상력의 결과이다. 그리고 석가탑은 현재 남아 있는 미륵사, 정림사 등의 백제 양식 석탑과도 모양이 꽤 다른, 전형적인 신라 양식 석탑의 대표작이다.
신라에서 활동한 백제 출신 예술가로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설계한 아비지가 있는데, 아마 이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아 아사달이라는 인물이 창작되었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미륵사 창건을 신라 장인들이 도왔다는 서동 설화의 기록도 생겨났을 것이다. 사실 황룡사 자체가 미륵사의 규모와 미학을 신라가 의식하여 생겨난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사달과 아사녀는 ‘껍데기는 가라’로 유명한 부여 출신 시인 신동엽이 1960년 발간했던 『학생혁명시집』에서 4월 혁명을 상징하는 존재로 소환된다. 아사달과 아사녀가 시의 주인공으로서 민중을 비유하게 되면서 백제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풍부해지고, 그들이 분단된 나라를 화해로써 통합하리라는 생각은 앞서 말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연상하게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런 상상 속 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백제의 미륵, 미륵의 백제가 지닌 실상에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상상력의 긍정적 역할에 해당한다.
반면에 실존 인물인데도 우리가 그다지 기억하지 않는 백제 스님도 있다. 통일신라 시대에 활동했던 진표(眞表) 스님인데, 송나라의 고승전에 백제 국적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백제 유민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듯하다. 전주와 강릉 일대에 미륵신앙을 전파했는데, 이들 지역은 훗날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건국했거나 주요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신흥 세력이 미륵을 내세웠던 이유는 각자 있겠지만, 백제의 미륵신앙은 이렇게 백제 자체보다 길고 굵은 영향력을 우리 곁에서 이어가고 있다.
서철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고려대에서 신라 향가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향가의 유산과 고려시가의 단서』, 『향가의 역사와 문화사』, 『한국 고전문학의 방법론적 탐색과 소묘』 등이 있다. 신라의 불교시와 설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