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신화]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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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신화] "온 세상이 불타고 있다"
  • 동명 스님
  • 승인 2021.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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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설교(The Fire Sermon)

인간의 역사에서 불처럼 유용하면서 불처럼 위험한 것이 있을까? 인간 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이 불의 사용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첨단 문명을 가능케 한 산업혁명 또한 불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불은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문학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의 장시 「황무지(The Waste Land)」의 제3부는 ‘불의 설교(The Fire Sermon)’다. ‘불의 설교’는 붓다가 불을 섬기던 제자들을 데리고 가야산을 넘다가 설한 「불타오름 경(Āditta-sutta)」의 다른 이름이다. 이 경에서 불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온갖 번뇌를 상징한다. 이 ‘불의 설교’가 향락과 부패에 찌든 현대사회를 ‘황무지’로 상정한 엘리엇의 시 속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황무지」는 서구 신화의 중요한 축을 차지하는 성배(聖杯)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서구 신화 속에서 어부왕은 벌을 받아 성불구자가 되었는데,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던 잔에 담긴 피를 성기에 바르면 치유된다고 한다. 어부왕의 성불구는 ‘도덕성이 마비된’ 불모의 황무지 같은 현대사회를 상징하며, 이를 치유하는 방편으로 ‘불의 설교’가 등장하는 것이다.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서

이 대목에서 ‘불’은 세상을 황무지로 만든 욕망과 갈애를 태워버리는 역할을 함으로써 ‘구원’을 상징하게 된다. 시인은 ‘탄다’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악을 제거하려는 열망을 표출하고, 그로 인한 구원을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라고 표현한다. 「황무지」에서는 불이 모든 욕망을 불태워버리는 ‘정화(淨化)’의 작용을 하지만, 붓다의 ‘불의 설교’에서 불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을 상징한다.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바라나시에서 60명의 제자를 아라한으로 만든 붓다는 그들을 모아놓고 이른바 전도선언(傳道宣言)을 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대들 역시 신과 인간을 구속하는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되었다. 이제 법을 전하러 길을 떠나라.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떠나라.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바라나시에서 충분한 실험을 거친 붓다의 전법은 이렇게 해서 세계만방으로 떠날 준비를 갖춘다. 바라나시는 붓다의 교리가 구체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최초로 교단이 형성된 곳이다. 그런데 바라나시에서 탄생한 승가를 붓다는 연속적으로 끌고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60명의 우수한 인재를 발굴해놓고는 그들로 하여금 각자 길을 떠나게 하고, 당신 또한 홀로 길을 떠난다. 

이는 붓다가 내려놓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천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며, 붓다의 인생 목적이 오직 최대한 많은 중생의 평화와 행복에 있음을 말해준다. 교단을 만든 이 중 최초의 제자들을 각자 다른 길로 가게 만든 다음, 자신 또한 혼자 ‘외롭게’ 길을 떠난 경우가 어디 있는가? 붓다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깟사빠 삼형제의 귀의

붓다와 우루벨라 깟사빠의 만남은 애초에 붓다가 의도한 것이었다. 전도선언 이전에 붓다는 당신이 갈 길을 우루벨라로 잡았는데, 우루벨라와 그 인근에 바른길을 갈 수 있는 외도 수행자 깟사빠 삼형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깟사빠 삼형제는 우루벨라를 중심으로 커다란 수행자 교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를 땋아 묶고 불을 숭배하였다. 네란자라 강 상류 쪽에 큰형인 우루벨라 깟사빠가 5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고, 중류쯤에는 둘째 나디 깟사빠가 3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막내 가야 깟사빠는 강의 하류에서 200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붓다는 야사와 그의 친구들을 아라한으로 만든 뒤 오늘날의 보드가야 인근에 해당하는 우루벨라로 간다. 

“깟사빠님이시여,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당신의 처소에서 좀 쉬어갈 수 있겠습니까?”

500명의 수행자를 이끄는 깟사빠의 권위는 대단했다. 깟사빠는 곁눈질로 붓다를 바라보았다. 붓다는 당시 35세의 젊은 나이였으므로, 노숙한 깟사빠에게는 시봉하는 제자들도 없이 단신으로 온 붓다가 애송이로 보였다. 깟사빠는 가볍게 대답했다. 

“우리 사원에는 많은 수행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나그네가 쉴 만한 곳은 없습니다.”

“깟사빠여, 당신에게 제자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없다면 당신의 사당에서라도 묵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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