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彌勒] 내 안의 기적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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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彌勒] 내 안의 기적이 필요할 때!
  • 불광미디어
  • 승인 2021.04.27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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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순례

가난한 민초의 눈물진 땅마다 미륵이 우뚝 섰다. 땅속에서 불쑥 미륵이 솟았고, 현몽대로 가보면 미륵이 서 있어 예불하여 모셨다. 뱃사공이 강에서 건져 올린 미륵도 있고, 바다에서 끌어올려 모신 미륵도 있다. 미륵은 우리 땅 어디서나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 돌부처다. 들길을 걷다가, 등산하다가도 햇볕 잘 드는 바위 면에 거칠게 조각한 마애불을 마주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닳아 윤곽이 흐릿하고, 그 생김새도 절집의 잘생긴 불상과는 달리 푸근한 얼굴이지만 옛사람들이 간절히 치성 올리던 부처님이 틀림없다. 친숙하면서도 왠지 경외감과 묵직한 위용이 느껴지는 얼굴, 아련한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불상들…. 

미륵은 까마득한 미래에 이 땅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하기로 예정된 부처님이다. 현실로서는 실현 불가능한 꿈, 미완의 꿈, 그러나 끝내 이루고야 말리라는 희망과 믿음이다. 그래서 민초는 전쟁과 기근에 시달리고 압제자들의 억압이 가혹할수록 곳곳에 미륵을 세우고 기적을 염원해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눈물을 닦아주며 희망을 꿈꾸게 한 부처님, 이름 모를 들녘에서 혹은 깊은 산속에서 누군가의 마음 공양을 기다릴 부처님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그래서 경건하고 경쾌하다. 

여러 마애불과 불상을 보다 보면 미륵이 맞는지 갸웃거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개 하생 전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은 의자나 연화좌에 앉았거나 혹은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문경 봉암사 마애미륵여래좌상처럼 두 손으로 긴 꽃가지를 쥐고 있는 모양의 ‘용화수인(龍華手印)’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보통 10m 이상의 거불 입상은 미륵 관련 경전에 나오는 “석가불 장육(丈六), 미륵불 십육장(十六丈)”에 근거한 미륵불이라고 보면 된다. 이 경우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애 준다는 의미로 오른손 끝을 위로 향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게 하는 시무외인(施無畏印), 그리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뜻으로 왼손 끝을 아래로 해 손바닥을 밖으로 보이는 여원인(與願印)을 취한다. 

여기 소개한 미륵은 모두 규모가 크고 지역에서 상징적인 불상이다. 고려 초부터 조선 시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미륵은 전국적으로 수백 기가 남아 있는데, 주로 경기·충청·전라도 지방에 집중돼 있다. 천연암벽에 마애불 형식으로 조성한 불상은 옛 위치를 지키고 있지만, 많은 소불(小佛)들은 도시 변천과 절의 흥망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수고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절간 당우에 잘 모셔진 미륵이 있는가 하면 덩그러니 폐사지를 지키는 미륵도 있고, 무속인의 절밥을 먹는 미륵, 지역 박물관의 정원석처럼 서 있는 미륵도 있다. 

마을의 수호불인 미륵불, 밭두렁과 야산에 방치돼 있어 아쉬운 미륵, 옛 절터를 지키는 돌미륵을 찾아가는 길은 내 안의 기적을 염원하는 길,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되어줄 것이다.

 

화순 운주사 석불군 

빼뚜름한 탑들과 발길에 차일 듯한 돌부처들

하룻밤에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완성하려 했으나 미처 와불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새벽닭이 울어 천지개벽을 이루지 못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운주사(雲住寺).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창건했는데,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미(船尾, 배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천불천탑을 조성했다고 한다. 한편으론, ‘운주도사’의 기도에 감명한 천제가 천불천탑과 절을 지어주고 운주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운주사는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중건하고 많은 시주와 중창불사로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1942년까지만 해도 석불 213좌와 석탑 30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석탑 12기, 석불 70기만 남았다. 그러나 이 정도만 해도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늘어선 빼뚜름한 탑들과 툭툭 발길에 차일 듯한 돌부처들이 정교하고 세련되지는 못했어도 꼭 우리네 모습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특별한 공간이다. 

불상의 크기는 10m 이상의 거불에서부터 수십cm의 소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9층 석탑과 석조 불감, 원형 다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었고, 연화탑과 굴미륵석불, 부부 와불(臥佛)도 빼놓을 수 없다. 경내 곳곳에 배치된 탑과 석불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면서 대웅전 뒤쪽의 전망대인 공사바위에 올라서면 일주문을 향해 죽 늘어선 돌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천불천탑의 절정인 ‘부부 와불’은 길이 12m, 너비 10m의 바위에 나란히 누운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천지가 개벽하고 무려 천 년 동안이나 태평성대가 지속한다고 한다. 수많은 탑과 석불, 분명치 않은 창건설화, 언젠가 일어날 ‘부부 와불’이 운주사를 더 신비롭게 한다. 

 

화순 운주사

주소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천태로 91-44

가는 길 : 광주 제2순환도로-효덕 교차로-817번 도로-칠구재 터널-효산 삼거리-평리 사거리-도암삼거리-운주사

 

고창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 

천지개벽의 비기를 품다

수직 절벽에 마애불 한 기가 연꽃대좌에 앉았는데, 준엄한 얼굴에 파격적인 미소가 충격적이다. 우뚝한 코, 앞으로 쑥 내민 두툼한 입술, 눈초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가 참배객의 마음을 단숨에 꿰뚫는 듯하다.

길게 늘어진 두 귀, 뾰족한 육계에 이마에는 백호가 박혀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가늘게 선각(線刻, 선으로 새김) 되었고, 통견(通肩, 어깨에 걸침)의 법의(法衣, 가사나 장삼)에 가슴 아래로 군의(裙衣, 허리에서 무릎 아래를 덮는 긴 치마 모양의 옷으로 불보살이 입는 하의)의 띠 매듭이 가로질렀다. 양손은 배 위에서 쫙 펴서 맞댔고 흘러내린 옷 주름은 대좌의 상대까지 늘어졌다. 

이 마애불은 민중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봉을 받아온 미륵으로 많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백제 위덕왕이 검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불상을 조각하고 그 위에 동불암이란 공중누각을 지었다고 해서 ‘동불암 마애불’로도 불렸다. 더욱 놀라운 점은 미륵불의 비기(秘記)에 관한 것인데, 전봉준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손화중의 ‘비기탈취사건(秘記奪取事件)’이다. 

‘임진년 8월, 무장 대접주 손화중이 교도들과 함께 청죽 수백 개와 마른 동아줄 수천 발로 부계를 만든 다음 도끼로 석불의 배꼽을 깨부수고 그 안의 비기를 끄집어냈다.’ 미륵불의 배꼽에서 비기를 꺼내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손화중이 이 비기를 끄집어냈다는 이야기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들불처럼 번졌고 손화중의 접(接)으로 수만의 백성들이 몰려들어 동학농민운동의 불을 댕겼다. 당시 조선왕조가 곧 망할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동학사상이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이 미륵이 있었다. 도솔암은 선운사의 산내 암자로 원래는 상·하, 동·서·남·북으로 여섯 개의 도솔암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애불의 위쪽 365개 계단을 오르면 조선 초 5대 걸작 불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내원궁의 선운사 지장보살좌상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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