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깨고, 부수고, 까무러쳤다, 깨어나기
상태바
[상상붓다] 깨고, 부수고, 까무러쳤다, 깨어나기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1.04.27 14: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이불-시작' 전시 리뷰
장엄한 광채 (부분) | 1991/1997
생선, 시퀸, 과망가니즈산 칼륨, 폴리에스터 백 | 
<프로젝트 57: 이불/치에 마쓰이>, 뉴욕 현대미술관, 미국
사진. 로버트 푸글리시 | 작가 제공
 

온갖 화려한 색상의 구슬로 장식된 63마리 물고기들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열을 맞춰 전시되어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생선 썩은 내가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봉지에는 물고기 살이 부패하면서 생겨난 동물성 젤라틴 액체와 화려했던 구슬들, 물고기의 뼛조각들만 앙상히 남았다. 진동하는 악취에 결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강제 철거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설치 작가 이불(1964~)의 1997년 작 <장엄한 광채(화엄)> 이야기다. 자연과 인공,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의 경계를 둘러싼 이 스캔들을 계기로 작가는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그의 초기작을 면밀히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무명(無明)의 숲에서 떠오르는 태양처럼

날 일(日) 변에 날 출(出)이 합쳐진 그의 이름, 해 돋을 불(昢)은 ‘먼동이 터오는 새벽’을 뜻한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인쇄소에서 이 글자가 나오지 않아 직접 만들어 써야 했다는 이 특별한 한자는 반체제 운동을 하며 도피하는 중에 그를 낳았던 부모가 붙여준 이름이다. 재판을 받거나 수감되느라 매년 이사를 해야 했으며, 자신의 공책까지 뒤지던 공안 경찰과 아무렇지 않게 밥상머리를 마주 앉곤 했던, 가난과 감시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자연스럽게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눈을 떴다. 좌익사범 연좌제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직업인 예술가가 되기로 한 그가 썩은 생선을 장식했던 플라스틱 구슬은, 직장에 다닐 수 없었던 부모가 방구석에서 돈벌이를 위해 꿰던 바로 그 구슬이었다. 어떠한 인연에서건 한 작가에게 다가온 사물은 여러 사회문화적 맥락과 함께 끊임없이 의미를 확장하기 마련이다. 부모의 거친 손으로 알알이 꿰어지던 그 조악한 구슬들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관 중 하나인 뉴욕 현대미술관의 세련된 전시장 안에서 고급스러운 취미를 뽐내는 관람객들의 후각을 악랄하게 괴롭힌 썩은 생선을 장식했다. 이는 곧, 아시아 여성이라는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 일으키는 반란의 깃발이었다.

 

똑바로 바라보기, 그리고 저항하기

파격적인 작품 탓에 반항아, 여전사 등의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 그의 초기작들을 모아놓은 이번 전시회는 과연 볼만 했다. 특히 과격하기로 유명한 그의 퍼포먼스 작품 중 가장 묵직했던 작품은 <낙태>였다. 1989년, 작가는 동숭아트센터 객석 천정에서 등산용 밧줄에 묶인 채 나신(裸身)으로 매달렸다.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문자 그대로 온몸을 던진 셈이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도 상영되고 있었다. 이는 1990년, 천으로 감싼 솜이 인간 아닌 형체를 연상시키는 ‘소프트 조각’을 입고, 김포공항부터 나리타공항, 메이지신궁, 하라주쿠, 미나토구, 도쿄대학을 거쳐 도키와자 극장까지 이동하는 퍼포먼스다. 출국 절차를 밟고 비행기 좌석에 착석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과정에서 현지 경찰의 의심을 사는 등 무작위 대중과 맞닥뜨리며 예측하기 어려운 반응을 만들어냈다. 최승자 시인의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1981)의 시구를 인용한 제목에서 예측할 수 있듯, 남성 중심 사회가 구축해 온 권위와 위계에 저항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지금보다도 훨씬 더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적 시선이 공고히 제도화되어 있던 1990년대 사회에 대항하기 위해 작가는, 여성에 대한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시선을 자처했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실존적인 형체와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작가이자 여성인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했다. 선풍기 수십여 대가 설치되어 있던 거대 상영관에서 확연히 불고 있던 공기의 흐름을 피부로 느끼며, 30여 년 전 영상들이 지금 여기에 선사하는 여전하고도 분명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예술, 자각하여 망상에서 벗어나는 일

이불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에게 예술이란 “이데올로기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그는 가부장주의부터 한국의 근대 이데올로기, 권위주의, 작금의 지구를 뒤덮어버린 자본주의까지 분별을 일으키는 모든 주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예술에서 찾고 있었다. 분별을 여의어 실상(實相)을 깨닫는 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면, 이불 작가야말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이념을 걷어내고, 마주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자각할 수 있는 명료한 상태로 자신을 만들어나가는 이불 작가. 미혹과 망상의 그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정토를 다져가고 있는 작가의 예술세계가 또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 

 


관련기사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