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마음: 제목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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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마음: 제목 없음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0.09.28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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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술관 팀 아이텔(Tim Eitel) '무제(2001-2020)' 展에 대한 단상
팀 아이텔  |  벽  |  2018  |  캔버스에 유화 | 210×180cm

코로나19가 막 확산하기 시작한 대도시에서 거의 한 달을 괴로워하다 가족이 사는 제주도로 들어왔다. 치킨도 짜장면도 배달 오지 않는 외딴 동네, 필자 집을 포함해 딱 두 가구 사는 산속에 머물며 한가하게(?) 살고 있다. 글 쓰는 시간 외에는 개 두 마리와 산책을 하거나 바닷가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불러내는 친구도 없고, 연락해야 할 클라이언트도 없으니 전화기는 조용하다. 

바쁨과 긴장에 익숙해져 있던 마음이 ‘디톡스(몸 안의 독소를 없애는 일)’되고 나니, 온·습도에 따라 날마다 다른 오름의 색깔,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    나만의 피난처 ‘레푸기움’

류시화 시인이 쓴 ‘레푸기움(Refugium)’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피난처 혹은 안식처를 뜻하는 라틴어 ‘레푸기움’은 빙하기 등 여러 생물이 멸종하는 환경에서 동식물이 살아남은 장소를 말한다.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물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레푸기움’이다. 세상의 소란스러움으로부터 잠시 몸을 피해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할 수 있는 작은 공간, 필자에게 ‘레푸기움’은 제주도다. 제주의 거센 바람 속에서 풀잎들과 함께 흔들리며 내가 살아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는 곳. 팀 아이텔의 그림 속 인물들이 응시하는 곳도 열중하던 일을 잠시 내려놓고 사색할 수 있는, ‘레푸기움’과 같은 공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텔의 그림에서 필자는 비어있는 공간과 그곳을 응시하는 인물들을 본다. 숲 너머 비어있는 공간을 응시하는 <멕시코 정원>의 한 여성은 오른쪽에 있던 원피스 차림의 여성이 자신 앞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연속(커플)>에서 두 남녀가 말끔하게 구획 지어진 공간을 지나 향하고 있는 곳 역시 컴컴하게 비어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인생의 어느 순간엔가 꽂아 놓은 깃발을 향해 달리느라 어딘가에 두고 왔을지 모르는 영혼을 기다리기 위한 장소다. 마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외부세계로부터 잠시 떨어져 자신을 돌볼 수 있는 공간이다.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무엇에 그렇게 지쳤는지, 무엇에 그렇게 열정을 쏟아왔는지 점검해볼 수 있는 곳이다.

 

|    고요한 응시가 안내하는 마음의 자리

아이텔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곳’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들을 또 응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즉석 사진의 오른쪽 귀퉁이를 자른 것처럼 처리된 <멕시코 정원>의 화면 구성과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쇠구슬에 반사되어 보이는 관찰자의 실루엣은 응시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또다시 응시하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보고, 보이고, 그것을 또 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중층적 시선 속에서 문득 거울의 방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양한 각도로 놓여 있는 거울들에 둘러싸인 방의 한가운데에서 익숙했던 자신의 신체를 전혀 낯설게 발견하는 순간의 감각이 떠오른다. 어느새 그림을 보고 있던 시선은 화면 속 인물과 공간을 가로질러 내 몸과 내 의식으로 돌아온다.

그러고 보면 ‘레푸기움’이 물리적으로 외부세계와 차단된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깊은 산속 암자를 찾는다고 해도, 산새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럽고 솔바람이 번거롭다면 그곳은 더는 안식처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매연 가득한 종로 한복판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자신만의 ‘레푸기움’으로 순간이동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공간의 텅 빈 곳을 발견해내는 아이텔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현재 두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저 고요하게 응시해 보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몸과 의식으로, 본래의 마음자리로, 자연히 되돌아오기를.

|    ‘아무것도 없음’ 견디기

독일의 대표 화가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는 낭만주의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바닷가의 수도사>를 그려낸 인물이다. 그는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무력한 존재인지 드러내기 위해 화면의 80%를 하늘에 할애했다. 그가 그린 하늘은 무척 장엄하다. 문명을 한 번에 쓸어버릴 만한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하늘처럼 보인다. 앞뒤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벌써 귀가 습해진다. 아이텔도 비슷한 구도의 그림을 그린 적 있다. 그러나 아이텔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텅 빈 인디고 색 도화지처럼 납작하다. 희극을 떠올리기에는 밋밋하고 비극을 상상하기에는 건조한 그의 하늘 위에서 초점 둘 곳 없이 헤매던 망막이 현기증을 일으킬 때쯤, 문득 궁금해진다. 혹시 우리는 고요한 맑은 하늘을 참지 못해 차라리 폭풍우로 도망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것도 없음’이 불편해서 삶을 구태여 바쁘게 만들어 온 것은 아닐까? 작품에 꼭 제목을 붙여야만 하지 않는 것처럼, 마음에도 이름 붙이지 않을 수 있어야 맑은 하늘에 감사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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