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환장하는 잡종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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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환장하는 잡종의 세계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20.09.0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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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 물방울 맺힌 밥로스 풍경 | 2019 | 캔버스에 유화 | 45.5×33.4cm

“왜 미추가 있고, 그것을 둘로 나누어 하나를 택하려고 할까요. 왜 추를 버리고 미를 취해야만 할까요. 왜 미가 찬양되고 추가 저주 될까요. 왜 특별한 것만이 아름답게 되고 나머지는 추하게 될까요. 추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을까요. (…중략…) 누구나 아름답게 되려고 이리저리 애를 씁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무거운 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걸까요. (…중략…)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을까요. 둘에 있으면서 하나에 이르는 길은 없을까요.”

 - 야나기 무네요시 『미의 법문』 中

 

| 상투적인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필자는 전통 장인들의 ‘예술’을 ‘전시’하는 일을 했다. 늘 뒷덜미를 붙잡는 불편감이 있었다. 그것은 전통 장인이 만들어내는 사물과 필자가 예술이라고 간주해왔던 사물 간의 괴리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분명 내가 아는 ‘예술’이 아닌데, 그래도 일을 하려면 ‘예술’이라 불러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필자가 생각해왔던, 보아왔던 ‘예술’은 작가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독창적인’ 사물들이었다. 과거에 계속해왔던 것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만들어낸다면 ‘예술’이 아니었다. 예술은 오로지 감상을 위한 것이기에, 불상이나 소반처럼 ‘쓰임’이 있는 것은 ‘예술’이라기보다는 ‘공예’였다.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 산물이 예술이라면, 전통 장인들의 작품들은 예술이라 불리기에는 너무도 ‘상투적’이었다.

김혜리 작가는 세상에서 제일 상투적인 것들로 작품을 만든다. 그가 ‘빌려오는’ 그림들은 캐나다의 눈 덮인 산이나 열대 지방의 해변을 담은 풍경화, 용맹하게 울부짖는 호랑이나 민화투의 잉어와 연꽃, 어느 유럽의 시골을 연상시키는 매우 도식화된 해바라기밭과 같은, 누가 봐도 전혀 새롭지 않은 상투적 그림들이다. 몹시 상투화되어 보는 이에게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대중목욕탕 냉탕 벽면에 부조로 조각된 로마 귀족의 호화로운 목욕 장면이나 시골의 어느 백반집 벽면의 곰팡이를 가리기 위해 붙여 놓은 허름한 액자들이 떠오르는 정체 모를 이미지들, 그림보다는 벽지에 가까운, 이른바 ‘이발소 그림’들이다. 몇 년씩 ‘이발소 그림 전문 화가’에게 직접 스킬을 배워가며 고집스럽고도 정성스럽게 이 상투성을 재생산해내는 작업이 바로 그의 ‘예술’이다.

상투성은 매번 했던 말을 반복하는 목사님의 설교처럼 진부하고, 당연한 말만 하는 도덕 교과서처럼 성가신 것을 뜻한다. 상투성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대개 그것에 저항하거나 반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릴 뿐이다. 상투성은 장마철 방구석에 꽉 찬 습기처럼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게 만들어버리는,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감각이다. 그래서 상투성은 질문받지 않는다. 김혜리 작가는 이 교묘한 상투성을 정면으로 부딪친다. 다시 본다. 그리고 가장 상투적인 질문을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 피카소 그림과 이발소 그림이 동등한 세상

좋은 예술은 특별한 예술이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타고난 천재들이 탄생시킨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진품’이다. 우리는 왜 예술을 이렇게 생각하는가? 먼저 예술, ‘Art’라는 용어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Art’는 기술을 뜻하는 라틴어 ‘ars’에서 왔다. 예술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배워야 할 ‘기술’, 혹은 ‘기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예술과 예술가의 지위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의미의 ‘예술’은 1746년 아베 바퇴(Abbe Batteux)가 『하나의 원리로 통일된 순수예술』에서 음악과 시, 그림, 조각, 무용을 ‘순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일상 기술과 분리하면서 생겨났다. 근대에 탄생한 ‘미학(Aesthetics)’이라는 철학의 분과는 이러한 예술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학문으로서 천재적인 예술가 신화를 보급해왔다. ‘시스티나 예배당’을 인테리어 했던 미켈란젤로는 천재적인 ‘예술가’가 되었고, 다산을 빌기 위한 일종의 예배 용품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인류 최초의 ‘예술’이 되었다.

이제는 예술 앞에 ‘순수’라는 단어도 굳이 붙이지 않는다. ‘예술’은 이미 그 자체로 존재의 당위성을 보증할 수 있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무언가로 군림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예술’ 개념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여 처음 접했던 우리나라는 이후 전 지구적 세계화의 열풍 속에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러한 미술 개념에 적응해나갔다. 이렇게 ‘미술은 공예보다 우월하며, 천재성을 타고난 예술가가 만든 특별한 그림은 절대적 가치를 가진다’는 의식은 어느새 우리 안에 ‘상투화’되었다.

1988년 『문화의 곤경(The Predicament of Culture)』에서 제임스 클리포드(James Clifford)는 예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많은 창작물을 체계적으로 배제해왔는지 탐구했다. 독창적이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은 미술관이나 미술 시장에 자리한다. 이들은 ‘진품’, ‘명작’, ‘오리지널’로 불리며 완벽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된 공간에서 영위를 누린다. 그 외 다른 창작물들-이발소 그림, 장식품, (전통) 공예품, 공산품 등-은 잘해야 민속 박물관, 관광 상품관에 놓인다. 예술, 문화, 비예술, 비문화, 진품, 짝퉁, 걸작, 공산품 등으로 분류되거나 그 분류들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세상의 온갖 사물들은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순수) 예술’을 기준으로 하위 정렬된다. 예술에 있어서 천재들이 사는 세상과 범재들이 사는 세상은 미술관의 하얀 갤러리와 관광 상품관의 잡스러운 매대의 차이만큼이나 철저히 분리되어왔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미의 문제에 있어 천재와 범재의 차별 없는 세상을 꿈꿨다. 상하, 귀천, 선악, 미추, 예술가의 진품과 이발소 그림 전문 화가의 장식품 등 반대 성향을 지닌 모든 것을 떠나는 게 그의 소망이다. 그는 불교사상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다. 대립항을 떠난 ‘하나’에 대한 열망은 도달해야 할 곳이 아니라 이미 도달해 있는 곳이다. 괴로움은 구원을 향하는 길목이 아닌, 이미 달성된 구원 한가운데서 일어난다. 그는 반케이 선사(盤珪, 1622~1693)의 삿갓에 쓰여 있는 글귀를 이렇게 바꾼다. “본래 미추가 없는데/어디에 선악이 있는가/미망이기에 삼계는 성(性)이고/깨달았기에 시방은 공(空)이다.” 수천억에 달하는 피카소 작품도, 몇만 원짜리 이발소 그림도, 미추의 분별 이전의 무상(無上)한 나라에서는 모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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