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의 일상다담(日常茶談)] 노장의 “라떼는 말이야” 품격 절밥 60년 수행자의 넉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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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의 일상다담(日常茶談)] 노장의 “라떼는 말이야” 품격 절밥 60년 수행자의 넉넉함
  • 최호승
  • 승인 2020.06.2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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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통도사 | 현문 스님
1963년 월하 스님을 은사로 입산해 1966년 사미계를 수지했다. 통도사 강원을 졸업한 후 통도사, 송광사, 수덕사 선원을 비롯해 문경 봉암사, 오대산 상원사, 정혜사 능인선원 등에서 정진했다. 밀양 표충사 주지, 제26대 통도사 주지, 조계종 중앙선관위 위원, 호계원 재심의원, 총무원 총무부장, 통도사 사회복지법인 자비원 대표이사, BTN불교TV 및 BBS불교방송 이사도 역임했다.

별스럽다. 5월 날씨 얘기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하다가도 낮엔 따가운 봄볕을 내리쬔다. 짓궂게 하늘 찌푸리다 비를 흩뿌리기도 한다. 종잡을 수 없다. 불교 종갓집이라 불리는 불지종가(佛之宗家) 영축총림 방문 며칠 전이 그랬다. ‘사진이 걱정인데 내일 날씨는 좋을까, 질문에 적절한 답이 돌아올까, 심기를 불편하게 하진 않을까….’ 온통 일 걱정에 노심초사, 마음도 종잡을 수 없었다. 

하늘은 높고 맑았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질문을 착! 꺼내 놓고 좌복 위에 결연하게 앉았다. 정작 차 한 잔 두고 나누는 대화에서 준비는 무용지물이었다. 노장의 “라떼는 말이야(기성세대들의 고리타분한 얘기를 비유)”에 긴장과 많은 질문은 무장해제 됐다. 덥다고 느끼는 순간이었다. 보광전(普光殿, 주지스님이 머무는 곳)에는 청량한 바람 몇 줄기 흘러들어왔다. 

 

| 예측불허 시작은 100주년 잡지

일흔 넘긴 노스님은 여유만만했다. 털털했으며, 담백했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조명 등 불광미디어의 사진과 영상 촬영 장비가 사중스님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자 농담으로 그 시선을 물렸다. “삼보사찰 중 삼각대 없는 곳은 처음인데요, 스님.” “아, 그래? 김 목수한테 나무로 (삼각대) 잘 맞추라고 해. 어디 가면 골동품이라고 대접 잘 받을 거야.” 

허허허 웃으며 긴장의 끈을 늘였다, 묵직한 대답으로 느슨해진 긴장의 끈을 잡아당겼다. 후엔 차 한 잔 ‘천천히’ 마시며 다과를 들라는 다정다감함으로 분위기를 편하게 이끌었다. 그냥 따듯한 차 한 모금에 모든 걸 맡겨 버렸다. 결제나 포살 때면 대중 400~500명이 운집하는 큰 가람의 살림살이를 고민하는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 스님은 예측불허였다. 

그래서 뻔하지 않았다. 사실 스님이 첫 질문에 답을 할 때만 해도 절밥 내공 60년의 “라떼는 말이야”를 예상하지 못했다. 시작은 「축산보림(鷲山寶林)」부터였다. 「축산보림」은 1920년 1월 25일 통도사가 창간한 불교 잡지다. 당시 통도사 주지 구하(1872~1965) 스님이 펴냈다. 1919년 들불처럼 퍼진 3·1 만세운동 기세를 잇고 조선인에게 독립을 향한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던 구하 스님 원력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10년이 되는 1920년 첫 달에 「축산보림」이 나왔다. ‘영축산(靈鷲山)’을 줄여 ‘축산(鷲山)’, ‘보배의 숲[寶林]’이라는 뜻의 ‘보림’을 이름 삼았다. 통도사를 둘러싼 영축산에 독수리가 비상하는 모습의 표지는 구하 스님이 직접 그리고 썼다. 

“30년 앞은 내다보고 산 어른 같아. (내가)통도사에 입산할 땐 저녁 9시면 불을 껐어. 8시 50분이면 종무소에서 두꺼비집을 두 번 내렸다 올려. 불빛이 껌뻑껌뻑하지. 묵언 죽비 치면 새벽예불 때까지 꼼짝 못 했어. 당시에 전기가 귀했는데, 어른스님이 통도사에 전기를 끌어왔어. 지금 도량에 석등이 많은데, 우리가 등을 설치하려고 했을 때 보니 이미 구멍이 뚫려 있더라고. 어른스님이 그런 분이야. 일제강점기 핍박받던 시대에 교육이 살길이라고 내다본 거지.”

현문 스님은 구하 스님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도심 포교당 효시인 마산포교당 정법사와 1927년 설립된 배달학원(현 대자유치원), 혜화전문학교(현 동국대) 개교에 구하 스님의 원력이 담겼다고 했다. “신문화를 주창했던 분”이라는 현문 스님 말씀에 이견을 달 수 없었다. 

구하 스님과의 일화가 많았다. 그 옛날 어른을 어찌 그리 소상하게 알까 궁금했다. 현문 스님의 출가 인연이었다. 소년은 경봉(1892~1982) 스님과 가까웠던 부친 손을 잡고 통도사 극락암에 들었다. 소년과 부친은 경봉 스님의 추천서 한 장을 들고 부친과 월하 스님을 찾았고, 월하 스님은 구하 스님에게 소년을 소개했다. 소년은 구하 스님이 건넨 조청 찍은 떡 하나 삼키고 이렇게 생각했더랬다. ‘맛있다! 이 떡 원 없이 먹겠구나.’ 15살이던 해, 소년은 통도사에 입산했다. 은사는 월하 스님이었지만, 구하 스님을 1년 5개월 시봉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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