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수좌', 봉암사 적명 스님의 단 한 권의 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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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수좌', 봉암사 적명 스님의 단 한 권의 유작
  • 김재호
  • 승인 2020.02.12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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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명 스님의 첫 저서이자 유고집, 『수좌 적명』
글 적명 | 232쪽 | 2020. 02. 10 출간
수좌 적명 | 글 적명 | 232쪽 | 2020. 02. 10 출간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의 보살님은 낮은 목소리로 자신이 모셨던 스님의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보살님의 몇몇 질문에 답을 하다가 스님의 법명을 여쭈었다. 보살님은 스님이 입적하셔서 조심스럽다고 말했다. 통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봉암사 적명 스님의 원고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년 12월 24일, 봉암사 수좌 적명 스님의 갑작스런 원적 소식으로 세상은 떠들썩했다. 생전 어떤 자리와 권위도 마다하며 오직 출가인의 본분에 매진해 온 우리의 대표 선승(禪僧). 그래서인지 스님은 불교계 안팎으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나도 스님의 명성을 여러 번 접해 온 터라 안타까운 마음은 물론, 책 만드는 편집자의 습(習)에 ‘스님의 첫 책이 곧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언론 인터뷰를 수락한 일이 거의 없으셨고, 일반 대중을 위한 법석에도 잘 앉지 않으셨던 스님이시기에 남겨 놓은 원고도 없으실 테니 책 한 권 엮기가 만만치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보살님의 전화를 받은 그날은 스님의 유고집에 대한 이러한 단상이 희미해졌을 무렵이었다.

보살님으로부터 받아 본 스님의 원고는 다름 아닌 ‘일기’였다. 1980년부터 2005년까지 30여 년의 기록. 그중 엄선된 70여 편 글에는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일기 속의 스님은 대중처소로 자리를 옮기며 자신을 바라보는 후학들의 기대에 찬 시선을 두려워하기도, 끊임없이 변멸하는 세상 속에 점점 늙어 가는 자신을 걱정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구도(求道)의 여정 가운데 끊임없이 이는 번민을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단단히 단속하던 스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매순간 자신의 행동 하나, 생각 하나에 의지의 칼날을 들이대면서 빈틈 하나 허락하지 않는 자기성찰의 문장. 스님을 왜 ‘진정한 수행자’이자 ‘사표(師表)’라 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권혁재
ⓒ권혁재

 

수좌의 마음속에 안이함이 자리해서는 안 된다. (…) 수좌의 가슴은 천 개의 칼이요, 만 장의 얼음이어야 한다. - 2000년 7월 2일 일기 중에서

 

어쩌면 나는 스님의 유고에서 ‘세사(世事)를 초월한 도인(道人)’의 쿨(cool)함을 기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이 곧장 실망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치열한 수행의 길 위에서 끊임없이 번민하던 스님의 진솔한 한마디가 뼈를 때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인간 적명’과 마주하였고,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던 ‘참스승 적명’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적명 스님이 말하는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보살의 길’이다. 스님의 다비식 때도 공개된 스님의 법문 중 한 대목은 이렇다.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이니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사람이 깨달은 자이다 – 적명 스님 법문 중에서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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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불이(不二)와 중도(中道)를 강조하던 스님. 그 가르침의 골자는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니, 남이 행복해지지 않으면 나 역시도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살의 길은 스님이 지닌 깨달음에 대한 신념이다. 번민의 고통 속에서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자 했던 스님의 강한 의지는 사부대중을 향한 보살심의 발현, 바로 그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공부를 지어 얻고 마음이 열려 해탈을 성취한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이토록 오래 해도 안 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번뇌와 집착이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이 이루는 일이라면 이 세상 누구라도 해서 안 될 사람 없음이 너무도 충분히 증명된 셈이기 때문이다. - 2000년 2월 11일 일기 중에서

 

ⓒ권혁재
ⓒ권혁재

 

지난 2월 10일은 스님의 사십구재가 있던 날이다. 천여 명의 사부대중이 모인 봉암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사부대중들의 가슴속에는 스님을 향한 그리움이 맺혀 있었다.
불법을 향한 길 위에서 깨달음을 구하고자 번민 속에 꿋꿋이 전진하던 인간 적명, 깨달음은 곧 나와 우리가 다르지 않음을 철저히 아는 것이라 설법하던 스승 적명, 배움의 길 위에서는 아랫사람에게도 길을 얻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어른 적명. 비록 사바와의 연을 마쳤으나 스님이 남긴 발자국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일체 존재하는 바
허망하지 않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던가?
어떠한 일이 이 세상에 일찍이
그대 속을 아프지 않게 떳떳이 존재해 있더란 말인가?

찬바람 따라 지워져 가는 낡은 잎새들처럼
가슴속 부질없는 열기 식히며 헛된 상념들 잊고 싶다.
이제 두 번 다시
기웃거림 없이 오래 그리고 조용히 정진하고 싶다.
깊이깊이 참구에 들고 싶다.
- 1980년 10월 19일 일기 중

 

ⓒ권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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