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불교미술 연구에 몰두, 첫 논문집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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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자전적 에세이] 불교미술 연구에 몰두, 첫 논문집 내다
  • 강우방
  • 승인 2019.11.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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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보원사지 철불좌상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며 경주박물관에서 서울의 국립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귀국하여 보니 국립박물관의 분위기는 적막강산이었다. 생동감이 없이 고요했다. 정부청사가 과천으로 옮기자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이 비게 되었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에서 중앙청으로 이전하도록 결정되었는데 1년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아무도 이전 준비를 하지 않고 있어서 한병삼 관장께 서둘러야 한다고 재촉했다. 1985년 여름에 즉시 준비가 시작되어 마치 전시 상황으로 돌입한 듯했다. 5층은 연구실로, 1층은 사무실로 삼았다. 전시 공간이 매우 넓어진데다가 고고학은 2층, 미술사학은 3·4층에 전시해야

했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작품 선정, 패널 원고, 카드 작성, 진열실 재정비, 진열장 배치,도록 원고와 편집 등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전시 기획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관심도 없을뿐더러 전공이 없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원고 교정 볼 사람들도 몇 명 없었다. 박물관에서 전시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천신만고 끝에 이전 개관을 해놓고는 1986년에 미술부장이 되었으며 학문 연구에 매진했다. 매년 중요한 논문을 지속적으로 써나갔다. 매년 한 편의 올바른 논문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각각의 논문에 몇 년의 기초 작업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저서를 중히 여기지만 실은 뛰어난 논문의 가치가 더 크다. 1987년 「석굴암 건축에 응용된 조화(調和)의 문(門)」이란 논문을 『미술자료 제38호』에 발표했다. 석굴암에 대한 본격적 연구의 신호탄이었다. 건축에서 비례의 개념은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간파하고 비례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불상 연구자는 건축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나는 15년 후 사찰 건축 공포(栱包)의 구성 요소와 상징 구조를 밝히면서 한국 건축에 눈 뜨기 시작했다. 그 후 동양을 넘어 서양 건축에도 눈 뜨게 되어 서양 학자들과 교유하며 아테네와 파리 등지에서 학회 발표도 하였다. 아마도 동양의 학자가 서양의 건축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에 따라 서양 건축사에 큰 오류를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라. 

시대에 따라 비례의 전개가 달라지는데, 그작도 과정에서 처음 생기는 비례가 ‘1 : 루트2’다. 프랑스말로 이 비례를 ‘la porte d’harmonie’, 즉 ‘조화의 문’이라 부른다. 단지 그런 비례의 원리가 석굴암의 건축에 응용되었다는 것을 요네다 미요지가 밝혔지만 나는 그것을 더 깊이 연구하여 불교 사상과 연결 지었다. 조화(調和)란 사상적으로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으로 불교 사상에서는 원융(圓融)이라 부른다. 화엄 사상의 ‘하나가 모두이고 모두가 하나’라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도 조화의 세계다.

1987년에 「통일신라 법당(法幢)의 복원적 고찰」을 『김원용 정년퇴임 기념 논총』에 발표했다. 법당이란 것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완전히 잊혀진,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조형 예술품이다. 사찰 입구에 높이 솟은 깃대를 세우고 맨 위에 용의 머리를 두고 도르래를 장치하여 긴 번(幡)을 휘날리게 함으로써 절 입구를 장엄했던 것이다. 전혀 전모를 모르다가 앞 회에 언급한 것처럼 영주 출토 금동 용두를 보고 복원을 시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어떤 번을 걸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통일신라 시대에 사찰 입구에는 법당이 서 있었으나, 지금은 지주 둘만이 서 있을 뿐이다.

1987년 「경주남산론」을 『경주 남산』(강운구 사진집)에 실었다. 경주 남산의 석불을 전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논문이다. 공저 성격을 띤 책으로, 살펴보니 실려야 할 석불 사진들이 많아 이를 보완하고 내 논문도 실었다. 경주 남산은 의외로 넓고 깊어서 경주에 살지 않고는 전체 유적을 답사하기 어렵다. 계절마다 시간에 따라 태양이 조명하는 석불의 얼굴 모습도 다르고 옷 주름도 다르다. 서울에 살면서 가끔 와서는 남산의 유적을 올바로 체험할 수 없다. 신라 경주의 유적이나 작품을 완벽히 체험하려면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신라 1,000년 수도 경주에서 오래 살면서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을 함께 체험했으므로 백제 지역에 가서 작품들을 보면 삼국 간의 문화적 특성과 차이를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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