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한 물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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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한 물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 이주란
  • 승인 2019.07.25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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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합소득세 신고를 하러 마포 세무서에 갔다 나오는 길에 근처 카페에 들렀다. 처음 가 본 그 카페는 면적은 작지만 천장이 높고 인테리어가 깔끔했다. 시원한 오미자차를 주문하고 음료를 기다리며 카페 안을 둘러 보는데 주인이 말했다.

“유자청, 자몽청, 오미자청, 전부 제가 만듭니다.” 벽에 붙은 각종 수제청 홍보 문구를 보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 네.” 대답은 했지만 사실 내가 보고 있던 것은 그 옆에 붙은 커다란 2019년 달력이었다. “저, 혹시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음료를 받으며 내가 물었다. 주인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인터넷이요. 정확한 사이트는 기억이 안 나는데, 검색해 보시면 나올 거예요.”라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나는 주인의 허락을 받아 달력을 만든 디자인 회사 로고를 찍어 카페를 나왔다. 한눈에 일년을 다 볼 수가 있는데다가 투명해서 예쁘고 (방도 좁아 보이지 않을 것 같고) 메모가 가능한데 심지어 썼다 지웠다 할 수가 있네. 그런데 내일이면 6월 1일인데 이걸 사, 말아?

집에 오는 길 내내 그 생각만 했다. 이미 올해 산 달력만 해도 여섯에, 받은 것까지 하면 아홉인데… 근데 저런 달력은 없는데… 저게 제일 필요한데…….

집에 달력이 아홉 개라는 게, 그러니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데, 다 필요해서 산 것이고 필요해서 있는 것이다. 세 개를 얻지 않았다면 세 개를 더 샀을 거란 뜻이다(아홉 개 모두 집과 직장에서 잘 쓰고 있다).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 뒤로, 탁상 달력과 스케줄러에 해야 할 일과 기억해야 할 것들을 적어두지 않으면 몹시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집에 오자마자 카페에서 본 달력을 검색해 보았더니 세상에, 그렇지 않아도 살 생각이었는데 할인까지 하고 있었다. 아마도 올해가 5개월이나 지난 이유일 텐데, 그러고 보면 달력의 유통 기한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을 것 같다. 올해가 아직 7개월이나 남았는데도 달력을 사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하지만 달력들아, 내가 있잖아! 작년 11월부터 시작된 나의 달력 쇼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달력을 보며 나만큼이나 이게 필요할 것 같은, 그러니까 이걸 꼭 선물하고 싶은 한 사람을 떠올리기까지 했다(그러면서 곧바로 그녀의 사무실 빈 벽에 이 달력을 붙이는 상상을 했다. 딱이야, 딱!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고 보니, 그는 그 달력을 어디서 처음 보게 되었을까? 작년에 달력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회사에서 주는 달력 말고 달력을 선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5년 정도 알고 지낸, 한 출판사의 편집자인 그는 새해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내게 선물을 보내겠다며 주소를 물어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너무도 납작하여 마치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서류 봉투를 받을 수 있었다. 궁금함에 서둘러 봉투를 개봉했을 때 나는 ‘용기를 내고 싶어 타이거 슈트를 입은 강아지’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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