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인생은 다리, 지나는 가되 그 위에 집을 짓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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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암자의 숨은 스님들] 인생은 다리, 지나는 가되 그 위에 집을 짓지는 말라
  • 양민호
  • 승인 2019.07.01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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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암 흥선 스님

‘숲 그늘로 새벽 창이 열립니다. 뒷담을 넘어온 오동나무 가지가 열쳐둔 창문을 기우듬히 엿봅니다. 거기서 뻗은 오동잎 부채에서 일렁, 푸른 바람이 입니다. 창문 너머, 개울 건너, 숲 그늘이 자꾸 짙어갑니다. … 하늘은, 구름은 연못 속에 자화상을 그려놓고 물끄러미 제 모습을 들여다봅니다. 마당 위로 때글때글 쏟아지는 햇살에 여름이 익어 갑니다. 한낮 뻐꾸기 울음에 검푸른 숲이, 온 산이 미동조차 없이 아득한 졸음에 잠깁니다. 붉은 해가 서산마루를 넘으면 아이 부르는 엄마 목소리로 멧비둘기가 웁니다. 그 소리에 고향 마을의 저녁연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름다운 글이다. 어느 여름의 하루, 특별할 것도 없는 산사의 하루다. 날은 바뀌어도 어제 같은 오늘이어니,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이 일고, 숲 그늘은 하루하루 짙어간다. 뻐꾸기 소리 아득한 졸음에 잠기고, 고향 들녘에는 저녁연기 피어오를, 무념무상의 시간들이 저렇게 흘러간다. 흥선 스님이 쓴 글이다. 스님은 책을 여러 권 냈는데, 『일-줄이고 마음-고요히』라는 책에 나온다. 좋아하는 한시를 한편 번역하고, 그 옆에 짧은 산문을 이어놓았다. 이 산문과 짝을 이루는 한시가 고려삼은(三隱)이었던 길재(吉再)의 ‘한거(閒居)’. ‘시냇가 띠집에서 한가롭게 지내나니/ 달 밝고 바람 맑아 흥취가 겨웁고녀/ 손님조차 오지 않고 산새는 지저귀니/ 대 언덕에 책상 놓고 누워서 책을 보네.’

지리산 약수암 가는 길. 약수암은 실상사에서 머잖은 산내 암자라 큰 절에서 하루 묵고 올라갈 참이다. 극락전에 들러 내게 ‘효천(曉天)’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신 도법 스님께 인사했다. 스님은 ‘지리산의 아침’이라는 템플스테이를 주관하고 계셨는데, 안내 리플릿에 ‘길 위의 스승 도법 스님과 함께하는 2박 3일’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화엄학림, 귀농학교, 인드라망, 탁발순례, 화쟁과 결사, 그런 미답(未踏)의 길을 걸어온 스님에게 길 위의 스승! 참 어울리는 말이다. 종무소에 들렀더니 절 살림 얘기들이 두런두런 오간다. 차 한 잔 마시는 와중에 일하는 보살님 한 분이 바삐 일어선다.

“먼저 가요. 아들이 천왕봉에 소풍 갔는데 내려올 때가 돼서 마중 가느라 먼저 가요.”

“아니, 천왕봉으로 소풍을?”

나는 놀랍고 신기해서 “몇 살인데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초등학교 6학년”이라 한다. 남원시 산내초등학교 6학년 20여 명, 선생님, 학부모 두루두루 천왕봉으로 봄 소풍을 나선 것이다. 이른 아침 백무동을 출발하여 세석 장터목 지나고 천왕봉에 올랐다가 그 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 세석평전의 철쭉은 얼마나 아름다울꼬? 산내초등학교는 늘 소풍을 산으로 간다. 어디나 산 아닌 것이 없고, 산으로 빙 둘러 산내(山內)면이다. 1학년은 가까운 둘레길을 다녀오고, 2학년이 되면 실상사 맞은편 백운산으로 소풍을 간다. 3~4학년은 노고단이나 칠선계곡을 다녀오고, 5학년은 지리산 제2봉 반야봉을 오른다. 최고학년이 되면 오늘처럼 가볍게 최고봉으로 소풍을 다녀오는 것이다. 산내초등학교는 실상사의 귀농학교 덕에 학생 수가 100여 명으로 근동에서 제일 많다. 늘 지리산을 바라보면서 자라는 아이들, 저 안개 자욱한 높은 산으로 소풍 가는 그 자체로도 얼마나 재미나는 일일까만,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혹은 사는 것이 막연해질 때, 훌쩍 다녀올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 갔다 오면 다시 지혜가 생겨날 것이고, 그 산길의 기억이 아이들의 한 생을 좀 더 단단하게 해주지 않을까 하고, 나 홀로 생각이 제 맘대로 날아다니는 것이었다.

이튿날 약수암에 올라가니, 흥선 스님 보릿대 모자 쓰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다. 합장 인사드려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 별 하실 말씀이 없다고 한다. 나는 보광전에 참배하고 멀뚱멀뚱하고 돌아다닌다. 지리산 암자 토굴 다니면 대개 그렇다. 환영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쫓아내지는 않지만 쉬 받아주지도 않는다. 내가 그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고, 그는 침묵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좀 더 오래 경내를 어슬렁거려야 한다. 나도 사실 불쑥 찾아가는 것이 스님이 홀로 맑혀 놓은 우물을 흐리게 하는 일이나 되지 않을지 조심스럽다. 하지만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길어오는 물 한 그릇, 말 한마디를 기다리며 그것으로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 삼는 것 아니겠나 하고 나는 생각한다. 하물며 이곳은 약수암(藥水庵) 아닌가!

“스님, 실상사 보광전은 작은데 비해 석등이 너무 크지 않나요?” 불교중앙박물관장을 지냈던 스님 전공 분야를 파고들어 불쑥 물었다. 스님 한심한 듯 쳐다보더니 그래도 말문을 연다. “석등이 언제 거요? 통일신라 시대요. 보광전은 언제 거요? 1884년 고종 21년에 월송대사가 세운 거요. 조선 후기하고 같아요? 그게. 목조 건물은 다 불타 사라지고 돌만 남은 거지. 그 앞에 서서 석등에 걸맞은 큰 법당이 앞에 있었겠구나, 하고 옛날을 상상하면서 봐야 하는 거요.”

“화엄사 석등 앞에 각황전 같은 큰 법당이 있는 것처럼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려.”

“화엄사 석등은 높이가 636cm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거요. 각황전은 원래 의상법사가 670년에 건립한 3층 장륙전이라 하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702년 중건한 거요. 시대도 다르고 그 규모를 정확히 알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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