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竹窓) 아래에서 써내려간 80세 노스님이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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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竹窓) 아래에서 써내려간 80세 노스님이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 김소영
  • 승인 2019.06.0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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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서 주굉 스님의 『죽창수필』

 

운서 주굉 지음, 연관 역 | 648쪽 | 양장 | 값_30,000원

 

죽창(竹窓) 아래에서 써내려간
80세 노스님이 꼭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

운서 주굉 스님의 『죽창수필』

 

작가가 글을 쓴 지 오래 지났지만, 시대를 뛰어 넘어 계속 읽히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작품을 ‘고전’이라고 부릅니다. 불교계에도 경전과 논서, 선어록 등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책이 여러 권 있습니다. 그중에서 종교나 공부 정도를 떠나 모두가 읽을 수 있는 고전을 꼽는다면 바로 이 책, 『죽창수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91년 실상사 화엄학림 초대학장 연관 스님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가 2005년 절판된 뒤, 2014년 다시 부활한 불교계 스테디셀러입니다.
『죽창수필』은 중국 명나라 때의 고승, 운서 주굉(1535~1615) 스님이 쓴 수필집입니다. 자백 진가, 감산 덕청, 우익 지욱 스님과 함께 명나라 때의 4대 고승으로 꼽히는 주굉 스님은 좀 늦은 나이인 31세 때 출가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양명학이 세력을 떨치던 시기였는데, 양명학의 불교 비판에 맞서 유불도 삼교를 조화, 융합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정토(淨土) 신앙을 중심으로 선(禪)을 결합한 ‘운서염불종’을 일으켰습니다. 여러 경전과 논서, 선어록에서 수행 지침을 가려 뽑아 엮은 『선관책진』의 저자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 주굉 스님이 입적하기 한 해 전인 80세 때, 자신의 79년 삶을 돌아보며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죽창 아래서 붓 가는 대로 진솔하게 써내려 간 수필 426편을 담은 것이 『죽창수필』입니다. 그 안에는 스님이 보고 듣고 느낀 소소한 경험담이나 일상에서의 깨달음이 담긴 단상도 있지만, 잘못된 구습을 바로 잡기 위한 비판과 수행자에게 내리는 날카로운 경책도 있습니다.

속담에 “그 사람을 사랑하면 지붕 위의 까마귀도 어여쁘다.” 했으니, 이것은 애정이 지극한 경우를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인연이 변하고 정이 멀어져서 사랑이 바뀌어 미움이 되고 급기야 그저 밉기만 한 경우가 허다하니, 전의 애정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미움이 바뀌어 사랑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뻐할 일도 아니요, 미워한다고 해서 꼭 상심할 일도 아니다. 꿈속의 일이요 허공 속에 핀 꽃과 같이, 본래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미움과 사랑」 전문

뜰에 백합꽃이 피어 있다. 낮에도 비록 향기가 있긴 하지만 담담할 뿐이고,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코가 낮에는 둔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예리해진 것이 아니다. 한낮은 시끄러워서 모든 경계가 복잡하므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더라도 코의 힘이 귀나 눈으로 분산되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쓰는 것도 분산되지 않아야 정신에 집중한다는 것을 깊이 믿을지라!

- 「꽃향기」 전문

요즘 부유한 집에서 손을 대접할 때는 새나 짐승·물고기·조개 등 온갖 중생을 지지고 삶고 볶는다. 매우 옳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이가 따지듯이 물었다.
“『주역』에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성현을 봉양하라 하였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또한 『주역』에 “두 접시의 음식이면 제사 지내기에 충분하다.” 하고 가르치신 말씀을 듣지 못했는가?
그러나 승가에서는 비록 짐승을 잡지 않지만 소찬이라도 가짓수가 너무 많은 듯하니, 이도 역시 옳지 않다.
또 물었다.
“우란분재에 맛있는 음식을 골고루 준비하여 스님들께 공양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 가난한 노파가 먹고 남은 죽을 벽지불에게 공양하고 하늘에 태어나는 복을 얻었다는 경전의 가르침을 듣지 못했는가?
마음에 있는 것이지 물건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 「거친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하다」 부분

요즘 우리가 읽는 에세이와는 달리 글이 너무 간결하다고 느껴져서 낯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고 가슴속에 울림을 남기는 건 긴 글이 아니라 짧은 글이 아닐까요? 바쁜 일상 속 잠시 동안이라도 『죽창수필』 속에 담긴 고전의 향기를 느끼고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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