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명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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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명승열전
  • 이이화
  • 승인 2019.03.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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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속불이의 삶을 산 17인의 승려
이이화의 명승 열전
저작·역자 입력하세요 정가 18,000원
출간일 2019-03-14 분야 역사
책정보

판형 신국판 변형(150×225mm)|두께 26mm 400쪽| ISBN 978-89-7479-658-7 (0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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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우리 불교 대표 고승 원효부터 삼일운동 민족대표 백용성‧한용운까지
한 역사가의 신념으로부터 태어난 열일곱 승려의 약전(略傳),
한국불교사 속 인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역사가 이이화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엔 일정한 신념이 흐르고 있다. 그것은 당대의 시대정신과 중생 제도의 정신이다. 그가 스스로 밝히는 바와 같이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평등, 평화 등의 이념과 중생 제도의 실천운동은 저자의 역사관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을뿐더러 역사가로서 지난 과거의 일을 평가하고 반성하는 기준이 된다. 이러한 신념은 저자의 여러 저서에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전작인 『이야기 한국불교사』에서 냉철한 시각으로 우리 불교사의 명과 암을 드러냄에 주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건 그것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저자소개 위로

저자 _ 이이화

지은이는 1937년 대구에서 유학자인 야산(也山) 이달(李達) 선생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 대둔산에 들어가 한문 공부를 했으며, 청년기에는 민족문화추진회·서울대 규장각 등에서 근무하며 한국학 연구에 전념했다. 이어 역사문제연구소장·『역사비평』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사업’을 주도하여 이를 학문적으로 재평가하고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보면서 서울 종로에 전봉준 동상 건립을 이루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위원장을 맡아 지난 2018년 개관하였다. 서원대 석좌교수를 지냈고, 원광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민족사・생활사・민중사 연구에 열정을 쏟았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역사 인물을 재평가하는 인물 탐구에 주력했다. 이를 통해 일반인들이 우리 역사를 재미있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게 하여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편 한국사 연구 활동과 더불어, 부친에게 교육받은 유불선 합일사상을 기억해 한국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 온 불교의 정치적・사회적・신앙적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여 『불교신문』, 『불광』 등에 관련 글을 써 왔다. 특히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평등・’‘평화’・‘인권’ 이념과 ‘중생 제도’라는 실천운동은 지은이의 역사관에 일정하게 반영되었다.

저서로는 『한국사 이야기』(전 22권), 『인물로 읽는 한국사』(전 10권), 『한 권으로 읽는 한국사』,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전봉준, 혁명의 기록』, 『허균의 생각』, 『위대한 봄을 만났다』, 『민란의 시대』, 『이이화의 이야기 한국불교사』 등 다수가 있다.

목차 위로

머리말_ 명승의 삶과 행적을 찾아서


민중의 삶 가운데로 파고든 우리 대표 고승_ 원효

화엄세계를 일깨운 귀족 출신 승려_ 의상

풍수지리로 고려 건국을 예언한 신비의 승려_ 도선

천태사상으로 평등관을 구현한 왕자 출신 승려_ 의천

신채호가 인정한 자주진보파 승려_ 묘청

타락의 길 위에 핀 정혜결사_ 보조

우리 민족사의 시원을 밝힌 고려 국사_ 일연

고려 개혁정치의 선봉장_ 변조

한 톨 티끌 없던 조선 건국의 조력자_ 무학

부처에 귀의한 슬픈 충신_ 설잠

국난에 떨쳐 일어난 선사_ 서산

조일전쟁의 일급 공로자_ 사명

조선의 근대화를 꿈꾼 개화승_ 천호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여여했던 선풍_ 경허

일제 치하의 그늘 아래 피어난 대중불교_ 백용성

친일불교에 남긴 할_ 송만공

침묵하지 않았던 님_ 한용운


참고문헌
찾아보기

상세소개 위로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삶을 산 17명의 승려

신간 『명승열전』에서 저자는 그의 시선을 한국불교사 속 인물을 향해 돌려 열일곱 명의 승려를 오늘의 관점에서 조명한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는 시대정신에 투철했고, 불교적으로는 중생 제도의 신념에 충실했다. 지은이는 이러한 승려들을 소중하게 다루었다. 어쩌면 이 책이 내세울 개성이요,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승려는 모두 열일곱 명. 이 가운데는 우리 불교계에서 고승(高僧)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도 있고, 승려이지만 잘 조명되지 않았던 방외(方外)의 인물도 있다.
저자의 역사관을 바탕으로 선정된 이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승과 속의 경계를 허물고 번뇌 가득한 세간에 뛰어든 승려이다. 그리하여 당대의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몸소 실천하려 했다. 또한 전쟁이나 귀족의 횡포 등에 신음하는 민중을 위한 주의‧주장을 펴기도 했으며, 사회 개혁의 중심에 있기도 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한국불교사’

그동안 우리 불교사의 ‘위대한’ 승려를 다룬 책은 당대는 물론 다음 세대에 의해 ‘고승(高僧)’이라 불리는 인물을 조명한 예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그들의 행보, 그들과 관련한 역사적 사건들은 그들의 사상적 바탕에서 기술된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 책은 불교라는 종교적이거나 사상적인 측면을 기반으로 한 도서라 보긴 힘들다. 오히려 역사교양서로서 한국불교사, 넓게는 한국사에서 주목해야 할 승려의 행적을 전하고 재평가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화쟁(和諍)’과 같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사상적 맥락에 관해선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것의 드러냄이 이 책의 궁극적 목표는 아닌 것이다.
저자가 고백한바, 자신은 ‘불교사상사의 지식이 상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밝힌 것이라기보다 승려를 대상으로 한 다른 시각의 역사적 해설을 진행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더욱이 ‘이야기체 역사서의 시초’, ‘역사를 가장 쉽게 풀어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저자 특유의 서술 방식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조금은 낯선 이 열일곱 명의 승려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기록상 남겨진 그들의 행보와 그들이 남긴 문집, 그들과 관련된 민간 설화와 현대 자료 등의 전 방위적 검토에 더불어 저자의 확고한 역사관을 통해 해당 인물의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귀한 시간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주목해야 할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한국불교 대표 고승,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그들 생애의 찰나
- 원효(元曉), 의상(義湘), 의천(義天), 보조(普照), 일연(一然), 무학(無學), 경허(鏡虛)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승려 일부는 불자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게도 위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애써 포장하지 않는다. 이들이 보인 기행(奇行)은 물론 그들의 한계까지 서슴없이 기술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끝에 도달한 저자의 평가가 기존의 긍정적인 데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도 이러한 방식은 신선하다. 한편 저자는 이 책 전반에서 그들이 어떠한 실천적 면모를 보였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면서 그들의 현실적 행보가 보인 한계에 대해 논하기도 하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시대의 영웅, 선방(禪房)을 박차고 나서다
- 서산(西山), 사명(四溟), 백용성(白龍城), 송만공(宋滿空), 한용운(韓龍雲)

저자가 소개하는 열일곱 명의 승려 중에는 우리 역사 속 암흑기라 일컬어지는 시기에 선방을 박차고 나와 동분서주했던 영웅적 인물도 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의 혼란한 가운데 현실로 뛰어들어 나라와 민중을 구제하고자 창과 칼을 든 서산(휴정)과 사명(유정),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독립의 목소리를 한껏 높였던 백용성, 송만공, 한용운도 이 책에서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저자는 승려로서뿐만 아니라 현실 구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시대의 짐을 짊어지고 고뇌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함께 살피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한다.
비록 이들의 행적이 계율을 어기는 일이었다 하더라도 위기의 상황에서 주저하지 않은 그들의 행적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특히나 2019년 삼일운동 100주기를 맞이하며 이들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진 지금 그들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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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사의 방외(方外) 인물
- 도선(道詵), 묘청(妙淸), 변조(遍照), 설잠(雪岑), 천호(淺湖)

이 책을 특징짓는 지점에는 또한 다섯 승려가 있다. 도선, 묘청, 변조, 설잠, 천호가 그들이다. 이들은 우리 불교계에서 조명한 경우가 드물거나 없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이 승가에 귀의한 승려였다는 점, 그리고 우리 역사의 문제적 인물이란 점은 분명하다.
이들은 당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도선의 경우 그 행적이 미묘하지만 그가 제창한 풍수지리설, 비보설 등은 신라 말기 혼란한 시기에 고려 건국이라는 개혁의 정당성을 부여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에 대한 『고려사』 등의 기록이 고려 건국 세력이 지어낸 허구일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말이다. 한편 김시습이란 속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설잠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승려가 되었다. 그의 생은 기행의 연속이었지만 지조 있는 삶을 살았고, 자신의 절개와 애민정신이 투영된 많은 시편을 남기기도 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인물은 묘청, 변조(신돈), 그리고 천호(이동인)이다. 신채호는 자신의 글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에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인 묘청을 자주진보파 승려로 평가한 바 있다. 한편 변조는 양민과 천민들 사이에서 성인이라 불렸으며, 고려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타파하고자 정치적 행보를 늦추지 않았다. 천호의 경우 조선의 근대화에 관심을 두어 왕실과 일부 귀족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을 넘나든 인물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 세 승려는 역사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이야기되거나 그에 관한 흔적이 미미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관련된 기록과 자료를 통해 이들의 행적을 재구성한다. 그 가운데 저자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지만 또한 우리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기도 한다. ‘당신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말이다.

책속으로 위로

그 시대를 살던 승려로서 당시의 시대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중심으로 접근했다. 오늘날의 용어를 빌리면 중생 제도를 기본으로 한 대중불교나 참여불교(전통적 용어로는 호국불교)운동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살펴본다. 그러니까 불교사상을 기저로 하여 타락하는 불교를 바로잡거나 대중 교화에 얼마나 열중했는지를 검증한 것이다.(4~5쪽)

두 승려는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어둠 속에서 굴 하나를 발견하여 그 속에 드러눕곤 노곤하게 잠을 잤다. 원효는 새벽녘에 목이 몹시 말라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요행히 바가지에 물이 담겨 있어서 그 물을 시원스레 벌컥벌컥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이 머문 굴은 묵은 무덤이었고, 그 바가지는 다름 아닌 해골이었다. 두 사람은 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효는 마음이 뒤숭숭해지고 구역질을 해대다가 문득 깨달았다.(20~21쪽)

임금이 법회를 열 때 원효를 대덕으로 초대했으나 시기하는 무리들이 그를 지탄하며 끼워 주지 않았다. 그래도 때때로 시장과 거리에서 노래도 부르고 무애라는 이름의 바가지를 두들기며 돌아다녔다. 세상은 이런 원효를 미친 사람이나 파계승으로 치부했다. 그에게 많은 비난이 쏟아졌고, 시기와 질투도 함께 퍼부어졌다. 그러나 원효는 철저한 실험적 행동을 벌인 것이요, 아무 걸림이 없는 무애의 행각을 보인 것이다.(28쪽)

신라는 당나라 침략군을 몰아내려는 준비를 은밀하게 서둘렀다.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이 되었다. 다시 쇠스랑을 녹여 창을 만들었다.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은 먼저 장안에 들어가 정탐하려다가 인질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김인문은 당 고종이 큰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침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몰래 의상을 불렀다. 그리고 빨리 귀국하여 이 사실을 알리라고 당부했다. 그는 아무 어려움 없이 유학을 제한하는 연한인 8년 동안 공부를 마치고 669년 무렵 고국으로 돌아왔다.(36쪽)

문무왕이 어느 때 경주의 성곽을 쌓으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를 들은 의상이 “임금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풀 언덕에 금을 그어 놓고 성이라고 해도 백성들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내 복이 될 것이나 정교가 밝지 못하게 되면 아무리 튼튼한 성을 쌓더라도 재앙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고 건의하자 문무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성 쌓는 일을 중지했다 한다. 그는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실천적으로 백성을 사랑했던 것이다.(45쪽)

이런 일항, 지장, 혜철, 도선으로 이어지는 융합사상을 역으로 이용하여 확대 재생산한 자들은 고려 건국의 지배 세력이었다. 그들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일을 합리화하고, 고려 건국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끊임없이 조작해 냈는데 도선을 좋은 미끼로 삼았던 증거들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다.(52~53쪽)

천태종의 기본 경전은 『법화경』이다. 이 경의 중심 사상은 『화엄경』보다 구체적인 회삼귀일(會三歸一)에 있다. 곧 사람의 등급을 셋으로 나누는데 “아무리 모자라는 중생이라도 성불할 수 있다.”고 했고,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중생”이라고도 했다. 그러니 셋이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천은 부처가 설한 이 사상을 고려 현실에 뿌리내려야 한다는 신념에 차 있었다. 신분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평등관의 구현이었다(『대각국사문집』).(72쪽)

의천의 사상을 정리하면 본질적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의식 기반과 문벌 체제의 타파라는 안목에서 출발하여 불교의 전반적이고 구체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여전히 절들은 귀족의 원당으로 전락하여 재산 도피처가 되고, 정치권력 투쟁에 이용되는 따위의 현실적 모순에 휩싸여 있었지만 이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여 귀족불교를 민중불교로 끌어내리는 데에 실패했고, 원효의 깊은 뜻을 올바르게 실현하지 못했다.(76쪽)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최초로 묘청(妙淸, ?~1135)을 역사 인물로 평가했다. 그는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는 논문을 집필하면서 묘청의 자주국가 건설을 그중 하나로 들었다. 그는 묘청의 대위국(大爲國) 건설운동은 바로 자주파・진보파인 묘청 등과 사대파・보수파인 김부식 등과의 싸움에서 비롯됐고, 묘청이 실패하여 우리나라가 사대로 전락했다고 주장하며, 묘청을 웅대한 민족적 스케일을 지닌 인물로 서술했다.(82쪽)

연복사에서 문수회를 벌일 때 일이다. 신돈이 설법을 하다가 비가 오는데도 전(殿) 밖에 몰려 서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 그는 공민왕에게 “선남선녀들이 윗자리로 올라와 문수보살과 인연 맺기를 원합니다. 부녀자들로 하여금 전 안으로 들어와 설법을 듣게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설법을 베풀 때 부녀자들은 전의 바깥에 있는 것이 당시의 의례였다. 그런데 이때 처음으로 부녀자들이 전 안에 들어와 설법을 듣는 관례를 만들었다. 설법이 끝난 뒤 신돈이 부녀자들에게 떡과 과일을 나누어주자 기뻐하며 “첨의(僉議, 신돈의 직책)께서는 문수보살의 후신이십니다.”라고 감격해 했다.(143~144쪽)

고려의 역사를 국왕 중심으로 적은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이 사실을 한 줄도 다루지 않고 신돈을 반역자로 다룬 열전에만 소개했다. 신돈이 한 일은 모조리 반역 질로 다룬 것이다.(144쪽)

그는 분명히 나라가 위태로울 적에 감연히 구국의 길에 나섰고 전쟁이 끝난 뒤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직접 전쟁에 나가 살상하기를 꺼렸고, 이런 인품이 좋은 결실을 거두었던 것이리라. 그런데도 유자 출신의 벼슬아치들은 그에게 벼슬 내리는 것을 지탄하고 나섰고, 일본에 강화 사명을 띠고 갈 적에도 개탄과 비난을 토해 냈으며, 산속에서 염불이나 일삼는 오활(迂闊)한 승려들은 그의 실천적인 삶과 중생 구제의 행동을 두고 명리승(名利僧)이라며 얕보았다.(286쪽)

그가 조선말로 직접 번역한 경전을 이용했다는 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삼일운동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독교 목사들이 한글로 된 『성경』을 꺼내 들고 읽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가 이를 바라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우리 부처님 말씀은 모조리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은 한글로 되어 있다니!’ 경전을 한글로 번역해 대중에게 알려야 하겠다는 결심이 들어선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342쪽)

나이 들어 잔병이 잦았던 백용성은 서울의 천일당을 단골 약국으로 정해 자주 드나들었다. 이를 안 일제 경찰은 그곳 직원을 매수해 용성에게 접근하게 했다. 그 직원은 백용성의 신임을 얻어 백용성은 그를 선농단의 관리장으로 삼아 보냈다. 이 자는 대각교당과 선농단의 모든 정보를 알아내 일제 경찰에 밀고했다. 그리해 여기에 연루된 독립지사들이 모조리 체포되었다. 또 여기 주변의 마을 사람들이 독립지사들에게 밥을 주고 연락을 전해 준 사실을 캐내서 그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이 마을을 “절단부락”으로 불렀다 한다.(348쪽)

백용성은 누구보다도 불승으로서 식민지라는 암흑시대를 살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족 독립을 이루려는 의지와 고뇌를 한 몸에 짊어진 것처럼 실천하고 행동했다. 대각교를 표방해 새로운 시대정신에 따라 중생 제도를 이룩하려는 보살행을 도모했다. 그리해 물욕, 명예욕 따위란 한 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승려의 몸으로 부처의 참제자가 되었고 고통 받는 민족을 구하려는 지도자가 되었다.(352~353쪽)

그때 뒷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송만공이 분기탱천 벌떡 일어나서 총독부 회의실이 떠나갈 듯한 큰 목소리로 “내 말을 잘 들어라.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청정 비구 하나를 파계시키는 것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셨거늘 조선 승려 7천 명을 파계시킨 데라우치 전임 총독은 과연 지금 어디에 가 있겠는가? 무간아비지옥에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을 어찌 모르는가?”라고 소리치고 주장자를 세 번 쾅쾅 내리쳤다(윤청광, 『고승열전 14. (만공 큰스님)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 외롭네』). 미나미는 분노해 부들부들 떨었고 참석한 주지들은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362~363쪽)

한용운은 삼일운동의 주역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할 적에 그는 처음 개인 자격으로 여기에 끼어들었다. 한용운과 친분이 있었던 최린은 손병희를 도와 모든 실무를 맡아 진행시켰다. 그는 뒤늦게 불교계 대표로 한용운을 끌어들였다. 그리해 한용운은 전폭적으로 동의했고 불교계 인사의 영입, 민족대표의 선정, 선언서 준비 등의 일을 맡았다.(382쪽)

어느 날 그는 거적을 끼고 친구인 최남선의 집을 찾아가 문 앞에 펼쳐 놓고 구슬프게 곡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외치던 최남선은 죽었다는 뜻이다. 또 이상재가 죽었을 때 사회장을 치르면서 한용운을 장례위원으로 올렸다. 그런데 한용운 본인이 장례식장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철필로 죽죽 그어 대고 철필을 내던지고 나왔다. 이상재의 미온적 운동을 나무란 것이다.

그는 끼니를 이을 수조차 없는 쪼들린 생활 속에서 논설을 쓰고 시와 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래도 생활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여서 오직 제자들이 간간이 쌀되를 보내주는 것으로 죽을 끓여 먹었다. 이렇게 살면서도 그의 지조는 한 점 굽힘이 없었다. 어느 독지가가 성북동 골짜기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집을 지을 적에 엉뚱하게도 북향으로 집을 짓게 했다. 조선총독부 쪽을 바라보고 살 수 없다는 고집이었다.(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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