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는 실체(實體 substance)가 독립적 존재를 말하는데, 연기를 받아들이 는 불교에서는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사물事物이 조 건에 의해서만 생성 지속 소멸하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연기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만물이 자성自性을 결여하고 있다는 공空의 통찰로 이끈다. 어떤 사물이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한다면 그 스스로를 스스 로 이게끔 해 주는 본질적 속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 서 사물이 조건에 의해서만 생멸한다는 연기가 만물에 자성이 없다는 공空 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그래서 연기는 공이다.
그런데 철학전공 학생도 여럿 내 불교철학강의를 수강하는데, 이 가운 데 몇이 꼭 연기나 무상無常의 가르침이 가지는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질문하곤 한다.
고대 희랍의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이 끊임없이 변한다고 주장했습니 다. 그렇다면 만물이 변한다는 주장 또한 변하므로 결국 그것이 영구불 변한 진리가 아니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붓다의 무상無常의 가르침도 마 찬가지입니다. 무상 또한 무상하니까 결국 무상하지 않게 되어 만물이 무상하다는 가르침이 틀리게 되지 않습니까? 연기도 사물이 스스로 생 성 지속 소멸하지 못한다는 주장인데, 연기가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한 다면 우리가 그 주장을 믿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닐까요?
논리적으로 철저히 비판해 이치에 맞는 주장만을 받아들이겠다는 미국대학 철학전공 학생들다운 질문이다. 철학자들은 ‘둥근 사각형’이나 ‘결혼한 총각’ 처럼 그 자체가 모순을 포함하는 개념에 해당하는 사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 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모든 존재가 논리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논리 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연기나 공空의 개 념이 만약 패러독스를 내포하고 있어서 그 개념 자체가 모순이라고 증명된 다면 부처의 연기법을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보지 않게 될 것이다.
연기법 자체도 연기하니까 그것도 절대적인 진리가 아닐 것이라는 문제 에 대해 여러 각도의 논의가 가능하다. 먼저 연기가 공空이라는 통찰로부터 시작해 수행론과 관련지어 논의해 보자면,
(1) 연기는 공이다.
(2) 공에도 집착 말라. 공도 공이다. (공공) (3) 공이 공인 것도 공이다. (공공공)
(4) 공공공공, 공공공공공, .....
이와 같이 다른 사물뿐만 아니라 공空에조차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끊 임없는 부정(否定 negation)의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사람 도 있다. 이것은 연기의 법칙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서 수행과 관 련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논리적 관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수행의 관점에서 답변하는 것 은, 불자들의 수행의 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론을 다 루는 철학자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 미국학생들도 의심의 눈초리 를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나서서 연기론 자체를 논리적으로 공격 해 보며 그 해결책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연기는 연기하거나 연기하지 않는다.
(1) 연기가 연기한다면, 이것은 스스로 생멸하지 못한다는 점이 스스로 생멸하지 못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생멸한다는 것이 된다 (아닌 게 아니니까 기다). 즉, 연기하지 않는다.
(2) 연기가 연기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생멸하지 못한다는 점이 스스로 생멸한다는 것이므로, 스스로 생멸하지 못한다 (아닌 게 기니까 아니다). 즉, 연기한다.
따라서 연기는 연기하면 연기하지 않고, 연기하지 않으면 연기한다. 그래서 연기의 패러독스가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기의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 로 모순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면 연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 리가아니다.1 불법의근간根幹이흔들리게된다.
이제 위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해 보겠다. 연기의 진리 그 자체에 연 기의 진리를 대입하는 일은 실은 논리학에서는 금기禁忌이다. 그 이유를 살 펴보자.
모든 한국인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1) 이 말을 한 사람이 한국인이고 그 말이 거짓말이라면, 이 경우가 그 말이 참이라는 점을 한 번 더 확인해 준다.
1 무상無常에대해서도같은논의가가능하다.무상은무상하거나무상하지않다.그런데무상이무상하면무 상하지 않고, 무상하지 않다면 무상하다. 그래서 무상의 패러독스가 발생하는데, 철학자들은 이런 경우 무상 의 가르침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한다.
(2) 이 말을 한 사람이 한국인이고 그 말이 참이라면, 그 말은 따라서 거 짓말이다.
결국 한국인이 이 말을 할 경우, 그 말이 참이면 거짓이요, 거짓이면 참이다. 이것을 거짓말쟁이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수학에서 집합론(set theory)의패러독스를발견한영국철학자버트런드 러셀Russell이 든 더 좋은 예가 있다.
이태리의 한 마을에 그 마을에서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그리고 그런 사람만을 면도해 주는 이발사가 있다고 해 보자. 그러면 이 이발사는 스스로를 면도할까?
(1) 만약 이 이발사가 스스로를 면도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 는 사람만을 면도해 주므로, 그는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는다.
(2) 만약 이 이발사가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스스로를 면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면도해 주므로, 그는 스스로를 면도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면도하면 면도하지 않고,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으면 면 도한다. 이것이 이발사의 패러독스다.
우리 언어 특히 자연언어에는 우리가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 렇게 논리적으로 모순을 포함하는 개념이나 표현이 꽤 있다. 그래서 이런 모 순이모두제거되어논리적으로완벽한형식언어(formal language)를만들어보 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러셀은 어떤 표현을 그것과 같은 차원에서 그것 자체 에 적용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도입한다. 그래서 “모든 한국인은 거짓말쟁이 다.”라는 문장은 한국인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한 차원 위에서 내 려다보면서 참 또는 거짓이라고 말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이 문장은 물론 거짓이다. 그러나 패러독스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그 문장 을 말해보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그 문장의 참 거짓을 따져 보라고 하면 논리 적으로 패러독스에 빠지게 되어 낭패다.
또 “이태리의 한 마을에서 스스로를 면도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그리 고 그런 사람만을 면도해 주는 이발사가 있다”는 문장은 기호논리학의 표 현으로 바꾸어 보면 그런 이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 : (∃x)(∀y)(Sxy↔¬Syy). 따라서 이 문장은 거짓이다. 참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그 이발사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한 차원 다른 논리학의 관점에서 문제 를 비추어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이발사가 스스로를 면도하느냐 않느냐를 같은 차원에서 직접 따진다면 이 문장은 패러독스에 빠져 버린다.
연기의 패러독스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만약 우리가 왜 연기에 연기를 적용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논리학자들의 제안을 따라야 하느냐고 질문 한다면, 답변하기가 마땅치 않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를 사용함에 있어 그것 이 논리적으로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해야 한다면, 연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방식을 따름이 현명하다. 그래서 나는 연기의 진리를 그 주장과 같은 차원에서 그 자체에 적용하지 말고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관 점에서 비추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참이다. 진리이고 옳다. 여기 까지만 말해야 한다.
연기 자체에 연기를 적용한다면 패러독스에 빠지기 때문에 슬기로운 불자라면 현명하게 피해야 한다. 생각을 멈춰야 할 곳에서는 멈춰야 지혜롭다.
붓다의 14무기無記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의 취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철학연구』에서 말한 ‘삽으로 파다가 파다가 암반 (bedrock)에 도달하면 삽이 튕겨 나온다 (그래서 더 팔 수 없고 또 더 파서도 안 된다)’고 한말이 모두 같은 지혜를 담고 있다. 멈출 줄 알아야 지혜롭다.
* 지난 1월부터 시작한 <불교철학강의실 357호>는 이번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연재된열두에세이에또다른주제로된열두에세이를더해총24회의강의내용으로만들어진단행본으로곧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홍창성
서울대학교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졸업. 철학박사. 현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모어헤드 철학과 교수. 형이상학과 심리철학 그리고 불교철학 분야의 논문을 영어 및 한글로 발표해 왔고, 유선경 교수와 함께 현응 스님의 저서 『깨달음과 역사』 (불광출판사)를 영역하기도 했다. 현재 Buddhism for inkers (사유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을 집필 중이고, 불교의 연기緣起의 개념으로 동서양 형이상학을 재구성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