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 TRAHERE 화가의 자화상展 (서용선, 유근택, 최진욱)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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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 TRAHERE 화가의 자화상展 (서용선, 유근택, 최진욱) 리뷰
  • 마인드디자인(김해다)
  • 승인 2018.06.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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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거듭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화가가 자신을 모델로 해서 그린 초상화인 ‘자화상(self-portrait)’이라는 용어는 끄집어내다, 발견하다, 밝히다,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portrahere’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발전하여 오늘날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뜻의 ‘portray’가 되었고, 자아라는 의미의 self와 portray가 합하여 자화상을 이룬 것이다. 따라서 자화상은 간단하게 ‘자기를 끄집어내다, 밝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세계미술용어사전』, 월간미술) 굵직한 세 명의 화가 서용선, 유근택, 최진욱의 자화상을 한데 보여주는 ‘TRAHERE-화가의 자화상’전(2018.03.02.~05.20.)이 열린 경기도 파주 아트센터 화이트블럭을 찾았다.

|    그림의 시작

예술가들은 자화상을 언제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까? 서양에서는 14세기 말과 15세기 전반에 걸쳐 탄생한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인간이 모든 사물의 중심이자 척도’임을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 사상이 싹트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이전 화가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가보다는 의뢰받은 종교화, 역사화 등을 제작하는 장인에 가까웠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작가의 서명도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화가들이 점차 서명 혹은 넓은 화면 한구석에 작게 그려 넣는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나, “나 자신이 내 책의 유일한 소재입니다.”라고 밝히며 오직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아 글을 쓴 미셸 에켐 드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수상록(隨想錄, Essais)』, 자화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등장 모두 르네상스의 바람을 탄 사회문화적 흐름 안에서 이루어졌고 발전했다.

신을 담았던 화폭에 화가가 자기 자신을 담기 시작한 것은 분명 커다란 혁명이었다. 화가는 스스로를 더 이상 주문 받은 그림을 제작하는 장인이 아닌 ‘창조자’의 자리에 위치시켰고,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로서의 그림이 시작된 것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최진욱 작가의 <그림의 시작>은 쌓아 놓은 캔버스부터 난로, 주전자, 석고상 등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한 작업실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가만히 그 혼돈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 그리고 작업실 한 편에 세워둔 거울을 통해 보이는 응시자로서의 작가의 모습. 작가는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며 세상을 창조하려는 그 “처음”의 순간에 서 있는 자신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    내가 나를 바라보니

서용선 작가의 <자화상-파리>에는 작가와 거울에 비춰진 작가의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캔버스 안에서 오고가는 그 둘의 시선이 재미있다. 거울 속 작가는 거울 밖 작가를 노려보다시피 쳐다보고 있다. 거울 속 작가가 응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한 손으로 세면대를 집고 어깨는 약간 웅크린 듯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모습으로 왠지 지쳐 보인다. 거울 속 매서운 눈이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지쳐서는 안 돼, 정신 차리고 어서 너의 종착점을 향해 달려야지’ 하는 듯하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내 안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기 위한 

삶을 조작해 내는 행동으로 이루어지는데, 

나를 그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나의 위치를 거울 속으로 끌어가려는 것이다. 

끌려가지 않는 나와 

끌려간 것처럼 보이는 거울 속의 내가 

아크릴 물감으로 변해 천 위에 버티고 있다.    - 서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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