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붓다] 조재영 <낙원 아래에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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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붓다] 조재영 <낙원 아래에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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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0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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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常과 무상無常의 경계에 서다
사진제공:파라다이스 문화재단

낙원 (Paradise) 은 우리가 추구하는 완벽한 세계로, 우리가 믿고 기대하며 추구하는 모든 것들의 총 집합 체이다. 그렇기에 낙원은 걱정이나 근심이 없는, 언제나 가장 아름답고 무결한 곳으로 그려진다. 그렇 다면 낙원의 아래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상향 아래에서 은밀하게 그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연기 緣起 적 관점에서 사물과 공간을 인식-실험해온 조재영 작가의 <낙원 아래에서 Under the Paradise > 展을 찾았다.

| 무상 無常 한 나라의 앨리스

벽돌집을 하얗게 개조한 전시장에 들어선다. 전시장 문을 열고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것은 ‘공간’이다. 마주한 텅 빈 공간에서 시선을 돌리면, 벽을 따라 공간을 감싸고 있는 기하학적인 구조 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공간의 이름은 <Alice’s Room>. 찬찬히 사방을 훑어보니 형태와 용도를 규정할 수 없는 기하학적 기물들이 불안함을 자극한다. 질서정연함 속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익숙한 편안함의 자리를 불편한 물음표가 대체하는 순간이다. 여느 전시장처럼 공간의 정중앙이 아닌 모서리에 자리한 작품들, 작가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희한한 형태들. 책꽂이 같기도 하면서 책을 꽂기 어려운 형태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무언가가 연상이 되는 듯하면서도 연상되지 않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구조 물들로 잔뜩 둘러싸인 공간에 머무르며 <Alice’s Room>이라는 이름을 되새겨본다. 병에 든 물약을 마시고 몸이 아주 작아졌던 앨리스가 되어, 거대한 작품의 내부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Alice’s Room>의 한편에는 지하 전시장으로 통하는 작은 입구가 있다. 토끼를 따라나선 앨리 스가 된 것처럼, 토끼 굴로 가는 통로를 떠올리며 좁은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니 머리가 닿을 정도로 높이가 낮은 재미난 공간이 나타난다. 이번엔 케이크를 먹고 몸이 커진 앨리스가 되어, 고개를 숙여 가며 지하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Things from White>를 둘러본다. 새하얀 공간에 역시 새하얗고 기다란 모양의 구조물들이 세워져 있는 모습이다. 건물의 기둥을 연상시키지만 천장을 떠받치고 있지는 않기에 기둥이라 부를 수는 없다. 불편한 자세로 이 기둥이지만 기둥이 아닌 구조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테이블 밑에 들어와 있는 듯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하와 1층 공간을 채우고 있는 기하학적 구조물들은 기능이 있는 사물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실제의 기능은 없다. 사물들은 기능을 상실하여 무어라 명명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한 인터뷰에서 “아직 명명되지 않은, ‘제3의 사물’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말한 작가의 바람처럼, 전시장의 사물들은 책꽂이 같기도 하고 기둥 같기도 하나 그 어떤 것도 아닌 상태의 사물들이다. 규정할수 없는,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사물들이다.

시인 김춘수는 ‘꽃을 꽃이라 부르기 이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몸짓이 꽃이 되어버린 순간, ‘몸짓에 지나지 않을 때’의 변화무쌍한 속성들을 잃어버린다. 똑같이 생긴 장미는 세상에 없다. 그러나 그들을 장미라 뭉뚱그려 이름 짓는 순간, 우리는각 장미들의 차이보다는 동일성에 집중하게 된다. 더 이상 각기 다른 장미들의 변화무쌍함을 발견할 수 없다.

작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상태를 매우 불안해하고 또 불편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작품을 통해 지향하는 상태는 그런 것이다. 비어있는 상태, 무의미한 상태, 아무것도 아닌 보류의 상태 말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아마도 작가는 무어라 부를 수 없는, 이름 짓기 이전의 몸짓들을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이름 짓고 부르는 행위로 존재의 무상無常 함을 가리기보다는 장미라 불리기 전의 상태, 장미가 되기 이전의 그 변화무쌍한 몸짓들을 말이다.

몸이 아주 작아지거나, 반대로 아주 커진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 연출은 신체 자각에도 혼란을 준다. 공간에 작품이 놓여 있고 내가 작품을 본다는 당연한 자의식自意識은 시험에 든다. 전시장은 서울 한복판의 이상한 나라가 되어, 내 자신을 포함한 사물과 공간에 대해 ‘다르게 인식하기’를 유도한다.

| 인 因 과 연 緣 이 빚어낸 조각

1층과 지하 1층 전시장이 이상한 나라였다면, 2층 전시장에서는 이상한 사물들을 만난다. 조각 작품을 박스로 포장한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Sculptural Skin>, 테이블치고는 너무 높고 불필 요한 다리가 많은 <Monster Table> 등이 그것이다.

조각사에서 ‘좌대座臺 ’는 상당히 의미 있는 부분이다. 전통적인 조각(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에서 좌대는 위에 놓일 예술 작품의 받침대로서 기능한다. 일반적으로 전시장에서 조각을 보았다 함은, 전시장에 놓인 좌대가 아닌 ‘그 위에 놓인’ 조각을 보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좌대는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실과 예술을 구분해주는 근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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