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 칼파브릭샤와 카마데누
상태바
[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 칼파브릭샤와 카마데누
  • 심재관
  • 승인 2018.01.02 15: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칼파브릭샤kalpavr.ks.a

초여름이 되면 개와 함께 나무 밑에서 잠을 자던 날들이 있었다. 그리고 잠에서 일어나면 구름을 쳐다보며 이런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만일 다시 태어나면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고. 아마도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아무 소리 없이 그늘을 내어주던 나무가 부러웠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당돌하고 엉뚱한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미에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육도윤회를 벗어난 존재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나 힌두교에서 나무를 신성시했던 이유는 동물이 피해갈 수 없는 폭력과 그로 인한 죽음의 공포를 직접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가 나무를 잡아먹는 경우가 있던가? 또는 대지가? 가장 오랜 인도의 문헌을 살펴보면, 인도인들은 그것이 유정물이건 무정물이건 그것에 어떤 물리적 변형이나 폭력을 가하는 일에 대해 끔찍이 두려워했던 흔적을 자주 보여준다. 베다 제사를 위해 땅을 파거나 나무를 자를 때 심지어 돌과 같은 무생물을 옮기고자 했을 때도 이들에게 보상하고 치유하고자 했던 모습은 매우 상세히 묘사되고 있다. 자연에 가하는 어떤 변형도 폭력으로 인식했으며, 그 폭력이 죄와 벌로써 자신들에게 되돌아올 것이라는 공감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인도인들의 물활론적 태도와 정서는 아마도 불교나 자이나교가 비폭력 정신을 탄생시켰던 매우 근원적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나무의 매력은 그것의 조용한 침묵에 있으며, 바람이 불 때만 가만히 대답하는 겸손함에 있다. 서슴없이 자라나지만 또한 서슴없이 팔과 몸통을 내준다. 이런 나무는 인간 누구의 가슴 속에나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쉘 실버스타인의 그 나무처럼,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일찌감치 인도의 종교 문학 속에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인도, 아니 전 아시아를 걸쳐서 이 나무는 세상의 모든 나무와 인간관계를 대변한다. 이 나무의 이름은 칼파브릭샤Kalpavr.ks.a, 다시 말해,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다. 이 나무는 상상의 나무지만 지상의 특정한 나무와 결합하면서 소원수所願樹나 기원수祈願樹를 대신해왔다. 마치 보리수菩提樹가 어떤 특정한 한 종류의 나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것처럼, 지상의 칼파브릭샤는 어떤 때 코코넛 나무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슈바타(피팔), 어떤 때는 반얀나무를 가리키기도 했다. 어떤 나무를 기원수로 삼을 것인가는 그 땅의 주인들이 나무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달라진 것이다. 어떤 나무가 칼파브릭샤로 선택되던지 그 나무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 모두를 내주는, 모든 것이 다 쓸모가 있었던 그런 나무였다.  

이런 신성한 나무의 등장은 불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이었을 것이다. 현재 인도에도 잘 남아있는 수목신앙은 나무를 통해 소원을 빌고자 했던 고대인들의 심성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이며, 힌두교와 불교도 이러한 수목신앙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수목의 정령 야차yaks.a를 인정한다든가, 부처님의 일생 동안 등장한 수많은 나무의 출현은 고대 인도인들과 나무의 긴밀한 관계를 읽어내고도 남는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나무에 우유와 옷가지를 공양한다. 이것은 특정한 종교를 떠난, 훨씬 더 원초적인 자연과의 교감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