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구례 천은사 바수반두존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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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구례 천은사 바수반두존자도
  • 강호진
  • 승인 2017.09.0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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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장어의 초상肖像
사진. 최배문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 내가 내가 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란 존재는 언젠간 내가 아니게 될까?”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관통하는 페터 한트케의 시 「유년기의 노래」다. ‘내가 되기 전에 난 뭐였을까?’라는 물음은 향엄이 스승 위산에게 받은 유명한 화두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과 맞닿아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나 이전의 나’를 찾으려는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급기야 ‘나’와 ‘나 이전의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어지러워진다. ‘나’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익숙했던 ‘나’는 금세 낯선 어떤 것으로 변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묻기를 그치는 순간 우리는 천국에서 추방당해 어른들의 세계로 내던져진다.

나이가 들어서도 질문을 잊지 않는 이들도 있다. 붓다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집을 뛰쳐나와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답을 구했다. 붓다의 수많은 스승 편력을 쫓다 보면 그가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는 타인에 의지하는 것으론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아이처럼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모든 질문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붓다가 얻은 자유를 스피노자식으로 표현하자면 “참된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모든 것을 붙잡는 것, 즉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붓다는 자신과 세계의 근원이자 고통을 일으키고 소멸시키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은 연기법이었다.

붓다가 열반에 든 지 900년쯤 뒤 간다라 지역에 세친(世親, 바수반두, 320-400)이란 천재가 등장한다. 마명馬鳴, 용수龍樹 등 극소수의 승려에게만 허락된 보살이란 칭호가 세친에게 붙는 것만으로도 불교사에서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만약 세친이 없었다면 이후에 전개된 불교사상사의 볼륨은 몹시 빈약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상적 행로를 살피면 붓다에 버금가는 방황이 있었다. 붓다가 이웃 종교인들에게 종종 모욕과 멸시를 받았듯, 세친 또한 그 방황으로 인해 적대자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부파불교의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계승자인 중현(衆賢, 상가바드라)이 『순정리론』에서 쏟아낸 악담만 보아도 그렇다.

“세친은 무슨 이유에서 경량부 상좌들과 함께 사악한 패거리를 이루어 수승한 공덕과 뛰어난 깨달음을 갖춘 불타의 성스러운 제자들을 비방하고 중생들을 악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는가? 지금부터라도 헛소리를 멈추기 바란다.” 

중현이 괜히 욕을 퍼부은 것은 아니다. 세친은 부파불교를 대표하는 설일체유부의 핵심교리를 담은 『아비달마구사론』을 쓰면서 곳곳에서 경량부의 학설을 빌려 설일체유부를 비판했던 것이다. 『바수반두법사전』에 의하면 세친은 처음에 설일체유부로 출가했으니 고향을 배신한 셈이다.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경량부의 사상적 경향이 짙은 『성업론』을 집필하고, 종국엔 대승불교로 전향해 중관학과 더불어 대승교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유식학을 정초했다. 대승불교도에게 세친은 대승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상징, 즉 먼 길을 방황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 탕아였고, 부파불교의 눈으로 보자면 그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철새처럼 날아간 변절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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