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불교학의 발주자, 이능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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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불교학의 발주자, 이능화
  • 이민용
  • 승인 2017.06.2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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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누구인가

이능화 (李能和, 1869~1943)

이능화(李能和, 1869~1943, 이하 모든 선현, 학자에 대한 존칭 생략)에 대한 정의는 단순치 않다. 근대기 한국에서 발아된 국학의 분야들을 돌이켜 볼 때 그렇다. 우리가 한국학이란 이름 아래 다루는 민속, 풍속, 무속, 민속종교는 물론 불교학이나 종교학의 표제 아래 다루는 한국의 유교와 도교, 기독교의 유입, 천도교, 대종교 등 어느 것 하나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심지어 여성문제나 기생문화와 한글창제의 문제까지도 다루고 있다. 가히 한국학 분야의 다면불 같은 인물이다. 그리고 그를 우리의 근대 개화기의 주시경(1876~1914), 최남선(1890~1957)과 신채호(1880~1936)와 함께 한말의 3대 국학자로 내세운다. 가히 근대 한국학 분야의 개척자로 앞세울 만하다. E. 사이드가 근대 종교학의 발주자이자 비교 언어, 신화, 불교연구의 개척자인 막스 뮐러(Max Müeller, 1823~1900)를 일컬어 “개창의 영웅(The Inaugural hero)”이라 지칭한 경우가 이능화에게도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과연 어떤 국학 영역을 그에게 대변시켜야 하는지 또 하나의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학계에서 지적하듯 이런 그의 업적에 상응하는 적절한 평가와 조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의 저작에 대한 연구의 미흡함이 지적되고 있다. 이미 20년 전(1993년), 한국종교학회는 그가 관여한 국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평가를 시도했었다. 이 작업을 통해 그에 대한 종합적 평가가 이루어졌으나 상당한 진폭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개척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였지만 그가 다룬 연구방법, 문제의식, 지향점에 대한 한계와 부정적인 시각은 만만치 않았다. 주로 역사학계에서 제기된 견해이지만 그를 과거 유물적인 참고 사항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특히 그의 주요 관심사였으며 학문적 데뷔를 한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1918년 간행)는 이러한 상반된 평가의 극단을 보이고 있다. 한국불교사 최초의 서술이자 불교 자료의 보고(寶庫)로 평가되는 저술이고 아직도 그 자료는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 그를 달리 보고 검토하려는 시도 역시 소홀했던 듯하다. 더욱 불교학계의 근현대 불교를 다루는 학자들 사이에서마저 그를 언급하는 일은 무척 인색하다. 퇴경 권상로나 포광 김영수를 한국 근대불교학 연구의 중요한 실적을 남긴 학자로 부각시키는 노력과는 무척 대조적이다. 오히려 단선적 민족주의론의 시각에 의해 그를 친일적이라는 이름 아래 망각시켜 소외시켰다. 과연 그럴까?

 

2. 전환기적 생애−한계인가 창안의 계기인가

이능화가 살았던 시대 여건은 전환기적 시기였다. 그가 태어났던 시기가 구한말 고종 초기인 1869년(高宗 5) 1월 19일이고 활동한 때는 일제 침입의 민족 수난기이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때는 해방을 앞둔 일제 말기인 1943년(일제 소화 18년) 4월 12일이니 조선조 말, 한국의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 사이의 격변기를 살았다.

겉으로 드러난 그의 업적은 학자로서 평온한 생활을 지속하며 근대적 학문을 흡수하고 민족운동이나 현실정치와는 무관한 삶을 영위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한학은 물론 영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를 습득, 특히 불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벨기에 영사관의 전속 통역관 역할을 한 구한말의 보기 드문 외국통 학자였다. 소위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와는 상관없는 학문 자체를 위한 학문을 위해 산 인물같이 부각된다. 그는 자신의 활동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어 이런 학자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나는 지난 경술년(1910년, 한일합방의 해) 가을부터 학교 교편 잡기를 쉬고, 그때부터 우리 조선의 종교방면(宗敎方面)과 사회사정(社會事情)을 좀 연구해 보기로 심산을 정해 10년간의 적공을 들여 무가치하나마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를 저술하고 연구를 계속하여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1책, 미출간), 조선신사지(朝鮮神事誌 1책, 미출간), 조선조선교(朝鮮祖先敎 1책, 미출간), 조선미신사상사(朝鮮迷信思想史 1책,미출간), 조선불교분류사(朝鮮佛敎分流史, 유재료 미편찬), 조선유학사상사(朝鮮儒學思想史, 유재료 미편찬), 조선기독교급외교사(朝鮮基督敎及外交史, 5호 활자 500항 가량 출판 중, 이상은 宗敎部) 상. 하편,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1책, 이미 출간),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1책, 이미 출간),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 1책, 이미 출간, 이상은 社會史의 女子部)을 저술하고, 지금은 조선사회사(朝鮮社會史, 一般社會史)의 기초에 착수하여 이미 일년 반이 되었으나……

거의 말년에 이른 자신의 학문적 관심과 업적, 그리고 그 작업과정들을 술회한 글이어서 자신의 생애를 요약한 글로 보인다.

이런 그의 생애는 시기별 활동을 따라 학계의 공통된 특징으로 다음 같이 나누고 있다.

1기 1869(탄생)~1887(19세): 유년 및 한학 수학기(유가 가문 출생과 과거시험 준비)
2기 1887(19세)~1910(42세): 외국어 수학 및 교수기(20년에 걸친 외국어 연마, 관립 외국어 학교 교관, 교장 및 학감 역임. 일본시찰)
3기 1910(42세)~1922(54세): 불교 연구기 및 불교운동기(능인보통학교 설립, 《백교회통》 및 《불교통사》 출판, 〈불교진흥회월보〉 등 잡지 주간 출간)
4기 1922(54세)~1943(75세): 종교일반 및 한국학 연구기(일반 풍속, 종교사, 사회사, 문화사저술, 조선사 편수위원)

위 연대기를 보면 초기의 교육과 자신의 지적 형성 시기는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전통과 직결되고 있다. 그러나 일찍 개명한 부친의 권유와 개화기 충격을 따라 전통유교와 단절하게 된다. 그리고 후에 이르러 오히려 자신의 형성기의 이념인 유교의 통치와 지배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게 된다. 개명한 부친 이원긍(李源兢)의 영향력이 컸다. 선도적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한 긍정적인 면이기도 했으나 또 선친의 기독교 제일주의 때문에 벌어진 갈등을 통해 그는 또 다른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 곧 한국 최초의 기독교사가 외교사란 맥락에서 저술되는 것이다. 종교사의 하나로 기독교사가 저술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외교사로 기독교사를 다루는 종교의 사회정치적 맥락의 탁견을 지니게 된다.

이조참의와 법부협판(法部協辦), 독립협회 회원을 지낸 부친 이원긍의 지시를 따라 1889년(21세), 서울 정동의 영어학당에 입학한다. 2년 뒤인 1891년(23세)에는 중국어(漢語)학교에 입학 1893년에 졸업한다. 다음 해인 1894년(26세)에는 또 다른 외국어인 불어를 공부하러 당시 관립 법어(法語, 프랑스어)학교에 입학한다. 이 인연은 후에 관립 한성법어학교 교장직에 오르게 하고(1906년) 벨기에 영사관 전속 통역관으로서 역할을 하게 한다. 그리고 후에 언급될 터이지만 그의 《조선불교통사》 집필의 정치적 상황과 그의 독특한 위치가 프레데릭 스타(Frederic Starr)에 의해 포착되어 해외에도 알려지게 되는 계기를 갖는다.

그는 27세인 1895년 갑오개혁을 따른 새 제도에 의해 농상공부의 주사로서 처음 관직에 오른다. 그러나 이듬해(1896년) 사임하고, 이어 한동안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교관으로 영어, 중국어,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다시 1905년에 일어야학사(日語夜學舍)에 들어가 뒤늦게 일본어를 배운다. 다음 해 졸업한 후 4개 국어를 구사하는 교수가 된다. 가히 언어적 기량이 뛰어났음은 물론 오늘날 불교학연구에서 언어적 재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교연구란 포기해야 한다는 정황을 그대로 앞서 체현한 듯하다. 실제로 전통적 한문체 서술인 《조선불교통사》(이하 《불교통사》 ‘통사’도 같은 책을 의미함) 속에서는 오히려 영어, 불어, 일어가 그대로 구사되고 있다.

1906년 10월 관립 한성법어학교장에 취임하고 이듬해인 1907년 최초의 근대적인 불교전문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 제2대 교장으로 재직한다. 1907년 같은 해 의정부의 명을 따라 2달 동안 일본의 여러 기관과 관청을 시찰하게 된다. 그로서는 최초의 해외여행이었고 서구 근대기의 문물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계기였다.

귀국 후 경술국치(한일합방) 전인 1908년 정월에 기왕 교관으로 봉직하던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의 학감이 되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 합방과 침탈이 시작되자 일제 총독부는 한성외국어학교를 폐교시켜 그 직책마저 잃고 만다. 이능화가 개화기에 처했던 전통적 환로(宦路)에서 벗어나 간신히 외국어 숙달의 문화인으로 탈바꿈했던 신분마저 단절되는 것이다. 그는 합방 다음 해 사설의 능인(能仁)보통학교를 설립한다. 이 ‘능인’이란 이름은 부처님의 또 다른 호칭이니 전형적인 불교 이름을 딴 사립학교이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불교와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활동을 펼친다.

이 시기에 그의 주저인 《불교통사》 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수집에 몰입한 것이다. 통사의 출판은 1918년이나 수집 기간은 합방(1910년)을 계기로 시작된다. 또 외부 활동으로 1914년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 간사. 1915년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1915, 3월 1호부터 같은 해 12월 9호까지만 속간됨) 편집인, 1917년에 불교진흥회이사가 되었으며 《불교진흥회월보》를 비롯한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1916, 4월 1호부터 같은 해 6월 3호까지만 지속됨),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總報》(1917, 3월 1호부터 1920, 5월 9호까지만 속간됨) 등의 불교 잡지 편집, 간행에 정성을 쏟으며 수많은 불교논문과 시사적인 글들을 쓴다. 다른 잡지에도 작지 않은 글들을 발표한다. 곧 《동명(東明)》(1922년 9월 1호 이후) 또는 권상로가 편집 겸 발행인을 담당한 《불교(佛敎》(1924, 7월 1호 이후)를 발표장으로 삼는다. 이 시기 1922년 그는 조선사편찬위원으로 위촉되어 후에 그를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 발해사의 한국사에로 편입, 건국신화의 포함 등 일련의 활동은 오히려 그의 민족주의적 행보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 후 청구학회(靑丘學會, 1939년 해산)나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 같은 민족정신의 계몽에 앞장선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불교와 조선종교사를 강의한다. 1938년 조선사 편찬이 끝나고 잠시 이왕직(李王職)에 나간 적도 있으나 곧 물러나고 1943년 운니동(雲泥洞)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입적한다.

천수천안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이능화의 이런 평전적인 모습이 한 외국인의 객관화된 시선에 의해 포착되고 있다. 그의 연대기적 평전의 특징에서 드러나지 않는 감추어진 면모들이다.

지금 한국불교의 관심을 다루는 잡지가 출간되고 있다. 지금껏 6년째 출판되고 있다. 그 편집인 이능화의 개인 역사는 흥미롭다. 그의 부친은 서울의 모든 선교교회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장로교회의 하나의 기둥과 같은 분이다. 젊은 이 분(이능화를 가리킴) 자신은 서울의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교육은 외국인들에게서 받았다. 그리고 지금 그는 벨지움 영사의 공식적인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즐겨 일하고 있는 것은 따로 밖에서 한국불교의 현양을 위한 이 잡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장로교 장로의 아들로서 가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불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일본어를 구사하며, 자신의 전문직은 외국 영사관에서의 일과 또 불교포교를 위한 잡지편집인인 그를 생각해보라! (Son of a Presbyterian Elder, trained in Catholic schools, speaking French, Korean, Chinese and Japanese, professionally engaged in service at a foreign consulate, he is the editor of a magazine for Buddhist propaganda!)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아직은 출간되지 않은 《한국불교역사》(조선불교통사를 지시함)의 저자이기도 하다. 내 생각에는 이 책이 한국불교의 전 분야를 다룬 유일한 저술이라 생각한다.

이를 기록한 스타(Starr)가 그에 대한 마지막 서술을 느낌표(!)로 끝맺은 점이 흥미롭다. 그가 관계한 외형적 일들은 오히려 복합적인 개화기 사건들 그리고 선친과 기독교 선교에 얽힌 미묘한 가족관계까지 노출시키고 있다.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시작되어 불교에 대한 인식과 귀의, 특히나 독창적 불교 저술 활동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고 있었다. 앞서 인용한 말년의 회고 기록에서 한일합방(경술년, 1910년)을 계기로 모든 외부의 직책을 사임하고 한국의 종교와 사회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직책을 사임한 2년 뒤에 《백교회통(百敎會通)》(1912년)을 발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함께 나타나는 이능화의 학문적 관점의 전이이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에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그의 관심은 불교로부터 조선의 문화 일반으로 전이 확대된다. 그 결실들이 앞서 언급한 《조선여속고》를 필두로 한 《조선기독교급외교사》 《조선의학발달사》 등 일련의 비불교적 타이틀을 지닌 문화 또는 역사적 저술이거나 논문들이다. 과거의 우리 문화 현상이거나 우리의 국학이 다룰 수 있는 분야들 전반에 걸쳐 있다.

지금의 이 시점에서 그가 관여했던 활동을 손쉽게 분류하고 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그가 다룬 분야는 다양하지만 채택한 방법이며 그 나름의 평가하는 시각이 오늘에도 유효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근대 국학 분야의 과거상(像)일 수도 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거대한 적석의 돌무덤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학술의 고고학적인 탐구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제 우리의 학문 관점의 시각과 심화에 의해 재단되고 음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섣부른 가치판단적 단정을 내리는 일은 유보되어야 한다. 그런 가치판단은 과거 사학계와 불교학계가 이능화에 대해 내린 실증사학적 정치적 판단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능화는 이런 한계인과 창조인의 사이에 걸쳐 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과거형이기보다 현재 진행형으로 다루어 다시 평가하는 것도 온당하지 않을까?

 

3. 한국불교의 원천, 《조선불교통사》

《백교회통》에 뒤이은 이능화의 중요한 저작은 단연 《조선불교통사》이다. 그리고 이 주저의 내용을 세밀하게 검토할수록 그의 각기 다른 저작들이 지닌 소재들이 통사에서 내재되어 통사는 그의 중요 관심사의 원천 역할을 한다. 다양한 그의 인문학적 주제들이 한결같이 이 통사를 연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이 통사를 기점으로 다른 논술과 저작들의 주제가 발아 확대되고 있거나 혹 다른 곳에서 발표된 독립된 소재들이라 하여도 결국은 이 통사에 귀납하게 된다. 가히 그의 사상, 학술의 매트릭스(母本)인 것이다. 그러나 이 통사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이해는 어떤가?

아직도 우리는 불교학 입문이거나 불교학 개론의 근거를 선명하게 말할 입장에 서 있지 못하다. 소위 우리 불교학 성립의 초보적 기틀에 대한 평가를 미루고 있다. 우리의 단편적 수입과 외래적 영향, 그리고 신앙일변도의 호교론적 발상과 그 특징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솔직한 평가가 결여되어 있는 점이다. 수입과 영향 및 자신에 대한 성찰의 결여, 그 사이에 이 《조선불교통사》가 위치해 있다면 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평가 역시 미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의 통사는 분명 하나의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앞에 지적했지만 통사에 대한 상반된 견해, 곧 이능화에 대한 비평은 통사에 대한 문헌 내재적 평가를 통해 밝혀져야 할 것 같다.

각 분야에서 통사에 대한 비판의 공통된 지적은 통사가 자료의 집대성에 지나지 않고, 일관된 서술과 뚜렷한 사관이 결여된 한문체의 구태의연한 서술이라는 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 강점기 조선사 편수관으로서 그의 역할은 일제 통치에 순응한 반민족적 학자의 행태였고 자료 나열식의 나이브한 서술은 자기 견해를 유보시킨 전형적인 현실도피의 방법이 아니었느냐고 비판한다. 이런 질문과 비판에 대해 여기서 일괄적으로 답변할 수는 없다. 앞으로도 계속 그를 주제로 놓고 재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사 하나의 텍스트 구조와 그 서술상의 특징을 탐색할 때 우리가 지닌 평가들을 다시 돌이켜 보게 한다. 오히려 그의 통사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함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결함이 그를 미완의 학자, 자료나 수집하는, 역사적 책임감이 결여된 자기 도피 내지는 일제에 순종한 부역자적 인물로 낙착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우리의 선입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통사의 구성과 서술상의 특징을 다시 검토할 때 오히려 이런 지적과는 전혀 반대의 결론에 이를 가능성마저 엿보이기 때문이다.

 

4. 《조선불교통사》의 저술 의도

이능화는 불교 근대화 시기에 일어난 이 사건들, 곧 3·1 운동 전야인 1918년까지의 사건을 그의 통사에서 기록의 색출이나 직접적인 증언을 통해 거의 빠짐없이 기술하고 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아도 그는 당시 불교의 근대적 정황이거나 근대적 전환이라는 과제를 자신의 학문적 소재로 삼은 듯 보인다. 개화기에 자신이 겪고 수집한 불교적 사건들을 객체화시켜 근대적 학문의 소재로 대상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곧 도성 출입의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불교의 근대적 제도의 설립, 그리고 일제 식민지 정책을 따른 사찰령에 의한 한국불교계의 변모와 적응, 일본의 한국불교에 대한 영향으로부터 3·1 운동 주도자인 한용운, 백용성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관찰자로서 또 기록자로서 접근한다. 같은 시대를 공유한 한 불교학자로서 한국불교의 역사와 승려들의 움직임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과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한국불교의 정통성에 관한 논의인 선교양종과 종파불교에 대한 인식, 임제종의 정통성에 대한 논의를 일제의 사찰령의 맥락 아래에서 현장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사상적 주류였던 사회진화론에 대한 논의를 불교계에서 전폭 수용한 사실도 적기한다. 한 걸음 나아가 적자생존의 사회발전이론을 불교의 업설에 적용시키는 진보주의적 과감성마저 보인다. 곧 근대 한국불교의 전개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을 일제 치하라는 정치적 식민통치의 배경과 연결시키면서 서술하고 있다. 아마 식민통치와 근대화라는 이슈가 최초로, 그리고 특징적으로 맞물리게 서술한 것이 이능화가 다루었던 근대불교사론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관점과 진술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이 통사였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종교와 사회사를 학문적으로 천착하며 불교의 역사를 서술하겠다는 저술 동기가 결국 통사를 출간하게 한 것이다. 인용했던 통사 저술의 의도가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저술에 대한 봉헌사를 쓴다. 곧 “이에 이조 오백 년간의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를 약술하여 최후의 봉도애사(奉悼哀詞)로 삼으려 한다”고 밝힌다.

이 저술이 조선왕조를 애도하는 학자로서 헌신이며 이 저술은 민족적 의의를 지닌 것임을 봉도사를 통해 천명한다. 겉으로 표명된 동기는 그러한 것이지만 불교의 역사를 서술하는 작업의 이유는 망실된 우리 문화와 역사를 복원 회복하는 일이라고 술회한다. 곧 “어떤 이유로 인민이 불교를 망각함은 물론하고 승려까지도 불교역사를 이토록 무지한가……. 나는 감정이 분기함을 참을 수 없었다”고 개탄하며 “이에 조선불교가 1500년간 계통적 역사가 끊어져 없어짐은 그런 계보를 알지 못하였었으니…… 한심치 아니한가”라고 전통의 단절과 문화의 소멸을 한탄한다. 각고의 노력과 정성을 들여 자료를 수집하였다고까지 술회한다. 그리고 이런 목적과 의의를 지닌 통사를 집필하는 방법과 서술 양식은 동양의 전통역사 서술 방법인 편년체, 기사체, 연의체가 혼용된 사서필법을 따르겠다고 천명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를 전통에 갇힌 전 시대적 계몽사학의 입장에 서 있던 한 전통주의자로 낙착 짓고 있다. 그리고 그의 전통적 서술 방법을 무척 불편해한다. 또한 그가 스스로 주장하고 자신의 뚜렷한 이념과 입장이라고 밝힌 점을 묵과하고 부정한다. 심지어 그의 입장을 뒤집는 결론을 내린 것이 사학계와 불교학계의 이능화에 대한 평가이다.

 

5. 서술방법−사서적 글쓰기의 이점(利點)

그는 《불교통사》 집필에 앞서 이미 불교에 대한 호교론적인 저술을 내었다. 최초의 저술인 《백교회통》(1912년)이 그것이었다. 이 책은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종교들을 객관적 입장에서 해설한 비교 종교학적 저술의 효시로 생각된다. 곧 불교와 다른 종교사상의 동등성 내지는 불교의 우위성을 주장하는 글이었다. 그는 자기의 주장이나 견해를 선명하게 드러낼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보기 드문 외국통의 개화인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보았다. 또 이미 몇 개의 불교 잡지 편집인으로서 기능을 했다면 더 이상 그가 근대적인 글쓰기를 몰랐다거나 시대적으로 낙후된 전통에 갇힌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종교 일반뿐 아니라 불교사에 관해서도 상당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가 통사에서 인용하는 학자들인 막스 뮐러(Max Müller, 馬庫斯彌由拉魯)를 비롯한 게오르그 뷜러(Georg Buehler, 菩遊拉魯)는 당시로서는 대표적인 서구의 인도학이나 불교학자들이었다. 일본의 근대적 불교학자인 난조 분유(南條文雄, 1849~1927), 오다 도구노(織田得能, 1860~1911)의 저술을 인용하고 중국의 양계초(梁啓超, 1873~1929)나 태허(太虛)를 언급한다. 그리고 스리랑카(Srilanka, 錫蘭)의 다르마팔라(Dharmapala, 達磨婆羅)의 불사리 기증(1913년, 8월 20일)을 중국에 선을 전한 달마 대사와 비유하며 옛 달마와 지금의 달마의 전법을 대조한 시를 짓는다. 해외소식에도 밝은 것이다. 그리고 구한말 가장 유행하고 영향력이 컸던 사회사상으로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 達佑仁)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種源論)》과 사회진화론(Social Evol-ution 天演論)을 자유롭게 거론하는 그의 지식체계는 가장 진보적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럼에도, 굳이 한문의 《사기》체를 채택함으로써 그가 전통적 저술에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이었을까? 이능화 자신도 이 방대한 자료를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 방법상의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통사의 하편 서문에서 이런 고민을 정확히 표현한다.

불교통사는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의도는 유통하는 데 두고 있다.[不拘体裁 意在流通] 마치 하나의 등불이 천 년의 암흑을 깨뜨리듯, 어두운 방안의 보배를 비추어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세상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바라건대 나의 이런 고심(苦心)을 양찰해 주기를 바란다.

현대에서도 이런 한문으로 된 기전체적 글쓰기는 가능하고 상당한 효과를 얻고 있다. 곧 중국의 나이강(羅爾綱)이 쓴 《태평천국사고(太平天國史稿)》는 이런 경우에 적중한 예이다. 그는 근세 중국의 역사를 《사기》 체제를 복원시켜 태평천국난의 시말을 밝히는 글을 썼다. 곧 기전체의 편년적 특징과 왕조사적 전개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도 “비슷한 것을 함께 묶고 구분하는 것”에 착안하였다. 왕조에 따른 시대 배열만 중시하는 기전체의 단점을 보강하며 전체를 보게 하는 것이다.

권상로의 자료집이 제공하는 것은 시대 배열을 따른 기록과 서술의 채록일 뿐이지만 나이강은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서론을 첨가하고, 강목체(綱目體)를 채택하여 표제와 간략한 설명을 달아 강(綱)으로 삼는다. 또 작은 글자로 사건을 기록하는 목(目)을 삼아 조각조각으로 떨어진 사건을 묶어 한편으로 조직화하였다. 사건의 내용을 역사적 시대기록에 부합시키면서도 사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내용으로 변조시킨 것이다.

나이강의 논문에서만 이런 《사기》의 개편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사기》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재편제가 이루어졌다. 불교사 역시 이런 틀에 적응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한학과 유교 전통에 능한 이능화는 착안했다고 본다. 곧 그는 조선의 불교역사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기》 편찬 방법에 적용해 서문을 달고 전체를 개관시키고 같은 것을 묶어 나이강처럼 주제를 따라 내용을 연결 해설한 것이다. 그의 통사 상편이 연대기적 기록이라면 중편은 동일한 사항을 묶어 역사적인 해설을 시도하고 하편은 세목화하여 구체적 항목을 풀어 설명하는 특징을 지니게 구성한 것이다.

그는 망실된 불교문화를 우리 역사의 전 과정 속에 복원시켜 우리 문화의 정사(正史)에 편입시키려고 시도했다. 곧 그는 왕조사와 불교의 상호 연관관계를 역사현장에 재현시키려 한다. 그의 논문 타이틀이 〈불교와 조선문화〉(《佛敎》 新42)라든지 〈이조왕실과 불교와의 관계〉(《新民》 1926), 〈조선 승려의 사회적 지위〉(《조선불교총보》)의 글들이 이런 의도를 잘 보여준다. 사회사 속에 불교를 연관시킴으로써 신이(神異)·기적·황당한 이야기거리[荒誕]라는 세속의 비판으로부터 불교를 끄집어내어 종교의 최종적이며 최고의 발전된 모습이 불교임을 보이려 한 것이다. 더 나아가 불교라는 종교를 진화론 사관에 입각한 역사 진행의 중요한 한 국면으로 강조하려는 시도를 한다. 또 자신이 불자로서 포교적인 효과마저 극대화하고 싶었다. 곧 그는 한국의 불교사를 전통적 역사편찬 방법에 조응시킴으로써 일반사와 동일한 선상에 위치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이능화의 통사의 약점이 옛 사료를 수집 정리한 자료집이라는 것이 지적되었다. 이 수집된 자료들을 정리하는 일은 이능화 자신에게도 과제일 수밖에 없다. 또 동양의 문헌 전통에서 고전의 원문은 그대로 인용되고 제시되어야 하는 “기술은 하되 새로 만들지 않는다[述而不作]”는 원칙은 고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료를 있는 그대로 제공하고 우리 문화의 유산을 현시해 주어야 할 이능화의 입장은 국한문으로의 번역이나 나름대로의 개인적 해석에 근거한 글쓰기나 서술은 의도적으로 피한 방법이었다. 통사 서문에서 밝힌 한문체의 “원형자료 그대로의 보존[爲存本來面目]”은 그가 적극적으로 채택한 저술 원칙이고 방법이었다. 그는 “이 책은 순 한문을 사용하였다. 곧 본래의 면목을 보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한 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어서였지 한계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사찰령의 기술에서 이런 점이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곧 “현금의 사찰령에 이르러서는 30본사의 본말사법 및 기타 법령·규칙 등의 문장은 그것들이 언문과 한문이 섞여서 사용되었으므로 율법을 존중하여 그대로 두었다”고 말한다.
그의 전통적 《사기》 편찬 방식의 이점이 최대한 활용되고 있는 점은 서문의 언급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기》는 단순한 편년체의 기사 묶음이 아니라 그 서술 가운데 춘추필법(春秋筆法)이 드러나도록 한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다. 소위 주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이후 강목체는 춘추 대의 명분이 살아나게 하는 편찬자의 가치가 배어 있는 서술이다. 더욱 이능화는 통감류의 포폄(褒貶)이나 호오(好惡)의 자세를 숙지하고 있고 통감류를 자료로 삼았다. 객관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서술자의 자료선별과 평가의 의도가 깃들어 있음을 피력한다. 통사 서문 범례의 ‘비류속사(比類屬事)’로 서술한다는 표현은 《사기》의 춘추필법의 ‘속사비사(屬事比辭)’란 말과 같은 뜻의 어구이며 “동일한 종류의 사건과 기사를 한데 묶어 종합하여” 기술할 때 거기에 포폄호오(褒貶好惡)의 숨긴 뜻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속사비사’ 혹은 ‘비류속사’의 작업을 통해 이능화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다. 그의 편찬 방법인 ‘비류속사’의 예증들은 결국 통사 전체를 관통하는 서술방식일 뿐 아니라 그의 사관의 천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전통적 방법으로 채택된 것은 ‘상현왈(尙玄曰)’로 나오는 ‘논찬(論贊)’ 형식이다. 논찬은 《사기》의 특징이며 《사기》가 창안한 저자의 논평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사마천은 “저술들은 모두 마음속에 맺힌 것이 있어서 된 것이다. 그 맺힌 것을 풀 수 없었기에 지난 일을 설명(述)하고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한다”고 하며 춘추학적인 포폄호오를 표방한다. 그것이 ‘태사공왈(太史公曰)’이라는 형식의 논찬으로 나타난다. 이능화 역시 통사에서 ‘상현왈(曰)’ ‘상현안(按)’으로 자기의 견해를 개입시키고 있다. 곧 사료를 그대로 유지시키며 그 사이사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부분이다. 논찬의 형식을 취해 자신의 사관을 유효적절하게 개입시키는 것이다. 특히 ‘상현왈’의 논찬이 하편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가 현재(이능화 당시) 불교의 상황과 사건에 대해 자신의 관점, 또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한용운이 임제종을 내세워 항일적인 교계의 움직임을 이끄는 부분의 기술도 주목된다. 이능화는 신행상으로 한용운과 자신을 분명히 차별화하는 발언을 한다. 그러나 이 임제종 설립의 문제에 대해 한용운의 역할을 부각시킨다. 평창(評唱)에서 자신의 견해를 노출시키며“벽암록을 제창하여 임제종을 일으켜 세우는 일, 이것이 내가(논평자인 이능화 자신) 바라는 바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라고 두 번씩 강조한다. 임제종의 설립은 정통의 복원이자 항일의 불교적 의지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사관을 피력한다. 《사기》 편찬방식과 표폄호오의 사관, 그리고 최종적으로 평창을 통해서 자신의 입장까지 표출시켰다. 그는 사학계이거나 우리 불교학계에서 비판하듯 자료나 수집한 사관이 결여된 무색투명한 문헌학자는 아니었다.

세 편으로 구성된 통사가 정확하고 일관성 있게 《사기》 편제에 배대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 부분 각개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사기》적인 편성서술이라고 보아 틀림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능화 자신이 《사기》 편성을 따른다고 선언했고 또 《사기》를 채택한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은 통사의 하편 마지막에 실린 자신의 전기에 대한 기록이다. ‘성불도승 이무능(成佛道僧李無能)’이란 표제 아래 자신의 전기를 3인칭으로 타자화시켜 기술하는 것이다. 이 전기 속에 자신의 행적과 심정, 당시 처했던 상황까지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사기》의 마지막 부분에도 역시 사마천의 전기가 실려 있고 그 자신을 제3자화시켜 서술하는 특징이 닮았다. 이능화의 통사도 동일한 서술구조이다. 이능화는 통사의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전기를 쓰면서 아마 사마천의 통한의 《사기》 편찬을 의식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기》 편찬을 주도면밀하게 의식하면서 이능화는 자신의 입장, 《조선불교통사》의 저술의도, 그리고 전통사관에 의한 현실 비판을 개입시킨 구상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다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사기》 편찬 방법을 채택한 또 다른 외부적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상정해 본다. 일제 검열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불교통사에 취하야”라는 글에서 책 출간에 기여한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다. 최남선의 교열을 제외하고는 모두 책 출간의 결정권을 쥔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다. 곧 편집, 열독(閱讀), 감정(鑑正), 출판 등의 실질적 영향을 미칠 책임자들은 한결같이 일본인들이었다.
분명히 검열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고 심혈을 기울인 자신의 저술이 현실적으로 출간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전제된 부정적 시각이 있어 굳이 일본인을 통한 출판을 의뢰할 것이 있었겠느냐 묻는다면 역사적 현장을 도외시한 이념적 판단이 될 것이다. 같은 해 보스턴에서 출간된 영문 《한국불교사》의 저자인 프레데릭 스타(Frederic Starr)는 이 검열의 문제를 직접 전면에 내세워 《조선불교통사》의 출판을 위한 검열을 우려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출간되는 모든 인쇄물은 일본정부의 검열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허락없이는 아무것도 인쇄될 수 없다. 그것이 세속적인 문헌이건, 종교적인 것이건, 사회, 경제, 문학, 정치적인 것이건 아무런 차이도 없다. 우리가 그의 책(조선불교통사)을 놓고 이야기하는 이 시점에서도 그 책은 검열을 위해 정부에 보냈다. 그 책이 승인되고 출판 허가가 나왔으면 하는 것이 바램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실로 가치가 있고, 그 현대적인 형태로 보나, 일반 독서인을 위해서도 전무후무한 저술일 수밖에 없다.

외국인이 《불교통사》의 출간 허락을 우려했다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따라서 저자 자신이 지녔을 우려는 더욱 컸을 것이다. 이런 검열의 현장을 돌파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아마 이능화가 의도적으로 채택한 전통적 역사서술의 한문 《사기》 편찬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6. 민족주의의 한계와 문화론적 시각

우리는 이능화를 다시 보아야 할 듯하다. 근대기 우리의 여러 국학 분야의 발주자로서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통사의 역사적 위상을 다시 평가하여야 할듯하다.

근대에서 우리 불교가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일본불교의 영향과 그 식민 정책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우리 학계는 일본불교의 유입과 영향이 한국불교에 얼마나 해악을 끼쳤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근대성이 내포하는 폭력성이며 제국주의적 억압이 우리 불교를 얼마나 변용시키고 말살시켰는가를 논의하는 작업에 집중되었다. 곧 불교의 근대적 전환은 일제의 식민지적 경험과 맞물려 있으며 모든 비판의 초점은 친일과 항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한편 불교는 식민지적 경험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객관적 시각마저 얻었다. 소위 불교를 학문적 대상으로 떠올리게 되었고 자신에 대한 객관적 시선을 갖게 되었다.
이능화의 문화적 시각과 나의 것에 대한 자료 모음과 해석은 그의 민족의식의 출발이었다. 그와 함께 개혁의 필요성도 역설하게끔 되었다. 한용운의 불교유신론은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리고 이회광을 위시한 행정 승려들의 제도정비를 시도하는 행정적 개혁들도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정비는 식민통치와 직접 맞물려 있다. 그래서 식민통치하에서 이루어진 근대적인 사항들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란 표제 아래 우리의 의식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친일 불가피론’이거나 심지어 간디의 토착적 생산 양식은 ‘근대화의 역행’이라는 식민(Colonizer)과 피식민(Colonized)의 역학관계를 끊임없이 재생산시키고 있다. 항일/친일이라는 행위를 평가하는 형식이 오히려 서구 민족주의 담론에 의거한 획일적인 도식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파르타 채터지(Partha Chatterjee)가 지적하듯 오히려 탈식민 세계에 살고 있고, 식민지 경험을 겪은 우리를 근대성의 지속적인 고객으로 남아 있게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 신변에서 일어난 이런 사건들과 우리 선현들의 업적에 대한 이분화된 평가가 빠진 함정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곧 서구 중심의 역사학은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후기 탈식민지적 비참함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오히려 이런 대치적 관계 설정은 영원한 식민지적 상상에 시달리게 한다.

반식민지적 민족주의 투쟁의 증거는 단일할 수 없다. 한용운의 항일투쟁 그리고 그것을 종교적 구세(救世)라는 보편적 이념으로까지 승화시킨 식민지에 대한 저항은 3·1 운동의 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의 획일성을 극복한 또 하나의 사례로 이능화의 문화의식을 제시해 보는 것이다. 근대적 전환을 전통 자체의 ‘내부’에서 찾고 그것을 근대적 학문의 틀로까지 제고시키는 작업을 시도한 이능화의 학적 성과는 주목되어야 한다.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통한 서구적 또는 일본 근대의 행태를 쫓는 오리엔탈리즘의 결실로만 규정지을 수 없다.

《조선불교통사》의 구조는 완전한 전통의 재현이었다. 그리고 그 서술 방법은 민족문화의 유산을 자료의 집대성처럼 ‘보일 정도’로 재현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서술의 목적은 과거에로의 복귀가 아니고 ‘지금−여기’의 현장성을 통사란 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민족문화의 복귀와 재현이라는 이능화의 평생의 화두는 결국 그의 근대적 자각에 의한 신학문의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발점은 국치가 결정적 동인이었고 그 결실로서 그는 국학의 ‘개창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며 그것은 ‘내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내 것’은 일제 치하이건 해방된 한국이건 항상 자각된 의식 속에 상존한다고 역설한다. 사학계가 단정하듯 일제의 학문 오리엔테이션에 안주한 ‘친일적 계몽주의’의 자료 수집가는 아니었다. ■

 

이민용 / 한국종교문제연구소 이사. 동국대, 하버드대 박사과정 수료(인도불교사상, 동아시아지성사 전공). 동국대·영남대 교수, 한국불교연구원장 등 역임. 주요 논저로 《학문의 이종교배−왜 불교신학인가?》 《서구불교학의 창안과 오리엔탈리즘》 《조선불교통사의 구조와 서술방식》 《불교의 근대적 전환−이능화의 문화론적 시각과 민족주의》 《원측−법상종의 아류인가?》 《미국의 일본 불교 수용의 굴절−헨리 올콧트, 폴 카루스, 釋宗演, D.T 스즈키의 경우》 등이 있다.

 

* 출처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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