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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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를 만나다] 유식唯識(11)
  • 김사업
  • 승인 2017.06.18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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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전변識轉變과 분별 그리고 자유
김사업

| 같은 소리가 왜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릴까?

유식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일체는 내 마음이 만든 것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마음이 만든 우물 안에서 평생을 산다. 눈에 보이는 광경, 귀에 들리는 소리, 옳고 그름,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은 다 내 마음이 연출하는 세계요, 내 마음이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그리는 그림일 뿐이다.

마음에 의해 꽃의 그림이 그려지는 순간 나는 꽃을 보게 된다. 여기에서 꽃을 마음에 의해 찍힌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라고 한 것에 주의해야 한다. 사진은 카메라 외부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베껴 놓은 것이다. 이에 반해 마음이 그리는 그림은 외부의 사물 없이 마음 독자적으로 그리는 허구의 그림이다.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이와 같이 내 마음이 그리는 허구의 그림일 뿐이다.

그러나 중생은 자신에게 보이는 꽃이 자신의 마음에 의해 그려진 가공의 그림인 줄 모른다. 보이는 그대로 꽃은 저기에 실제로 있는 것으로 오인해 버리고 만다. 중생은 뿌리 깊은 어리석음(無明) 때문에 시시각각 이렇게 오인한다. 이 오인의 결과로 눈에 보이는 좋거나 싫은 것, 나아가서는 자신이 파악한 모든 상相이 자신에게 보이고 생각되는 그대로 실제로 그렇다는 맹목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꽃은 꽃이고, 내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진짜 나쁜 것이다.’라고 맹신하는 집착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이다. 모든 번뇌는 여기서 시작된다. 중생은 평생 이 집착의 그물에 걸려서 ‘꽃’, ‘좋다’, ‘나쁘다’ 등의 상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거미줄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는 나비와 같다. 중생은 심지어 그것들이 허구의 그림이라는 진실에 의심을 품기 일쑤이다. 간혹 어렵게 수긍하는 것 같다가도 금세 기존의 집착으로 되돌아가 버린다.

이 집착의 그물은 언제 소멸할까? 모든 상이 허구의 그림일 뿐이라는 것에 대한 자각, 사무치도록 뼈저린 자각이 필요하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 의해 그려진 허구의 그림일 뿐이다.’를 유식의 용어로 바꾸어 표현하면, ‘모든 것은 내 마음(識)이 그런 형상을 띠고 나타난(=현현顯現한) 것일 뿐이다.’가 된다. 마음의 속성상 마음이 어떤 형상을 하고 나타나면 그 형상은 본인에게 그대로 인식된다. 내 마음이 꽃의 형상을 띠고 나타나면, 그와 동시에 나는 꽃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상의 내용을 전문 용어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2016년 12월호에 상세히 언급해 놓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내 마음의 외부에 어떠한 존재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경無境’이고, 오직 그러한 모습으로 마음이 나타나 마음 스스로에 의해 그렇게 인식된 것일 뿐이라는 것이 ‘유식唯識’이다. 미운 사람도 내 마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산과 들, 삼라만상 모두 내 마음이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 것이다. 마음은 지금 왜 많고 많은 형상 중에 어떤 특정의 모습으로, 예를 들어 꽃의 형상을 띠고 나타날까? 또 그 꽃에 대해 친구는 너무도 아름답다고 하는데 왜 나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식전변설識轉變說이다. 식전변설이 단지 위의 의문에 대한 답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식전변설은 유식무경이 성립하는 근거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식(識=마음)이 연기적 존재며 찰나적 존재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아뢰야식과 7식(안식~말나식)의 상호 인과因果에 의해 자신의 모든 경험이 생겨난다는 것을 밝히는 체계이기도 하다.

식전변설에는 이와 같은 복잡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칠판에 그림을 그려 가며 매우 전문적으로 설명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에게 주어진 제한된 지면과 여건으로는 이 식전변설 전체에 대한 설명은 불가능하다. 또한 일반인이 식전변설의 세세한 부분까지 전문적으로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래서 이하에서는 필요한 부분에 한정하여 이해의 편의 위주로 식전변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다음의 이야기부터 들어 보자. 문을 닫고 법당 안에서 목탁을 딱딱딱 쳤다. 바깥에는 불교 신자인 할머니와 유치원생 손자가 있었다. 문을 열고 물었다. “방금 전의 소리가 무슨 소리였어요?” 할머니는 목탁 소리라 대답했고, 손자는 나무 두드리는 소리라 했다. 같은 소리가 목탁 소리로도 들리고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도 들린 것이다.

혹자는 두 소리가 결국 같은 소리가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탁 소리와 나무 두드리는 소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는 종교적 의미가 들어 있는 소리이지만 후자는 그냥 나무 부딪치는 소리일 뿐이다. 같은 소리가 왜 이렇게 다르게 들릴까? 상식적으로 설명하면, 할머니는 절에 다니면서 스님께 목탁에 대해 배우고 그 소리를 여러 번 들었기 때문이고, 손자는 나무 두드리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는 정보만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식은 어떻게 말할까?

 

| 식전변識轉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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