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부산 범어사 천인도
상태바
[사찰벽화이야기] 부산 범어사 천인도
  • 강호진
  • 승인 2017.06.18 17: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꽃은 텅 빈 공간에서 핀다
부산 범어사 천인도 / 사진 : 최배문

천인天人은 하늘에 사는 이를 뜻하는 불교적 표현이다. 경전에서도 그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역할로 보자면 불교 대하드라마 속 보조 연기자에 비견할 수 있다. 부처가 등장하면 하늘에서 우르르 내려와 꽃을 뿌리고 공양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하곤 금세 사라져버리는 존재. 불교적 도상과 경전에서도 천인은 대부분 배경으로 소모되고 있지만, 좋은 연출자와 연이 닿으면 간혹 주연급으로 올라서기도 한다. 에밀레종에 새겨진 비천飛天은 모든 범종의 ‘시그니처’가 되었고, 『유마경』에 등장하는 천녀天女는 석가의 상수제자인 사리불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스승 역할을 맡았다. 범어사에 벽화로 그려진 천인들은 이 둘만큼 유명하지 않지만 나름 탄탄한 입지를 지니고 있다. 보통 법당에서 이런저런 도상과 함께 그려지기 마련인 천인들이 오직 자신들만 출연하는 전용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극장의 이름은 ‘팔상·독성·나한전’이다. 

팔상·독성·나한전은 절집에 오래 다닌 이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보통 팔상전과 독성전 그리고 나한전은 별도의 전각으로 건립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범어사의 팔상전과 독성전, 나한전은 한 건축물 안에 모두 자리 잡고 있다. 팔상·독성·나한전이 삼성각처럼 칠성과 산신, 독성을 한 공간에 모신 것과 비슷할 거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다른 방식이다. 팔상·독성·나한전이 하나의 건축물 속에 있다 할지라도 전각마다 벽을 세우고 문을 따로 두어 각자 독립적 법당의 구조를 갖추었고, 편액들도 출입문마다 따로 달려 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세 가구가 살고 있는 공동주택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런데 독성전과 나한전을 한데 묶은 것은 독성, 즉 나반 존자를 아라한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부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기록한 그림이 걸린 팔상전이 여기에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범어사의 팔상·독성·나한전이 이처럼 독특한 조합을 갖추게 된 연유가 있다. 일본 학자 세키노 타다시(関野貞)가 1902년 범어사를 조사하고 남긴 평면도를 보면, 지금 전각이 있던 자리에 팔상전과 나한전이 각각 3칸짜리 독립적 건축물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고 두 전각 사이에는 한 칸 규모의 천태문天台門이 서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범어사 측은 1905년에 중수를 하면서 두 건축물 사이 천태문이 있던 공간에 독성전을 새로 증축해서 전체를 하나의 건축물로 이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팔상전과 나한전은 세 칸씩 동일한 크기지만, 중앙의 독성전은 한 칸 규모로 양측 전각에 비해 협소하다. 흥미로운 것은 세 전각을 나누는 벽이 천장까지 완전히 막힌 구조가 아니라서 옆 전각의 기도 소리나 말소리가 들보 위 뚫린 공간으로 넘나든다. 더 중요한 것은 들보 너머로 옆 전각의 천장벽화가 훤히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이 벽화를 이해하는 데 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는 뒤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