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기운 북돋아주는 것이 내 역할이제.”
소리꾼 장사익
“오늘이 내 생일이네. 나는 좋은 날을 생일이라고 해유. 이렇게 좋은 날이 앞으로 내게 몇 번이나 올까 몰라.” 소리꾼 장사익을 만났다. ‘좋은 날 좋은 만남’을 그는 ‘생일’이라 불렀다. 장사익만의 언어다.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있는 장사익(69) 선생의 자택을 찾은 날은 주말 동안 내린 비가 그치고 청명한 하늘이 열린 봄이었다.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 도착한 붉은 벽돌집. 이름이 새겨진 문패 앞에 서자 반쯤 열린 문 안쪽에서 어서 오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집주인은 객인들에게 편하게 ‘변소’도 들렸다가 이층으로 올라오란다. 구수한 사투리로 안부를 묻는 그에게서 짙은 사람 냄새가 났다.
| 가슴이 시키는 노래
“창피한 이야기지, 내 나이 마흔다섯에 데뷔한 게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예유. 그 전에는 이런저런 일 많이 했지. 뭐 열다섯 가지 정도 직업을 바꾸면서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2, 3년 일했나. 인연도 아니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계속 직업을 바꾸다가 이렇게 가수가 되었는디, 이 일을 지금 20년 넘게 하고 있는 거 보니 제법 잘 맞나보네. (웃음)”
그가 말했다. “인생을 하루로 치면 45살의 나이는 밤과 낮이 바뀐 때다.” 45년간의 밤을 기다리고 인생의 광명이 찾아왔다. 밤의 기억도 낮의 시간만큼 고마웠다. 어릴 적 웅변으로 목청을 키운 경험도, 서울로 올라와 공부를 한 추억도, 직장을 옮겨 다니면서 알게 된 사람들도, 태평소를 불며 놀던 판들까지 모두 지금의 소리꾼 장사익을 만든 인연이다.
데뷔를 한 이후에도 폭넓은 활동으로 여러 인연들을 이어나갔다. 장사익의 노래를 들은 여러 스님들이 찾아왔다. 사찰 음악회 무대에 올라 부처님 앞에서 노래했고, 받은 사랑을 돌려주자는 마음으로 필요한 곳에 기부도 했다. 여러 후원 행사마다 공연하며 고마운 나날을 보냈다.
2006년 12월 그의 공연 ‘사람이 그리워서’ 콘서트를 진행했다. 유니세프 기금마련을 위한 소리판으로 정해 콘서트 수익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면서 유니세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장사익 선생은 그 다음 해 2007년 5월에 유니세프 한국위원 특별대표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미주순회공연을 하여 모은 수익금을 유니세프에 기부하였다. 이후 8년여간 본인의 소리를 통해 어린이 사랑을 꾸준히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를 맡았다.
친선대사가 된 후 세계 구호활동에 더 힘썼다. 네팔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는 긴급 구호와 네팔 팔찌 캠페인에 참여하여 모금 활동을 하였고, 필리핀에 태풍 하이옌으로 피해가 발생했을 때에는 피해 현장에 직접 가서 피해자들을 돕는 구호 활동을 벌였다. 도움의 손길을 더하기도 하고 위로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며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친선대사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내가 헐 줄 아는 거이 뭐 있나. 거기 손이 귀하대서 손 하나 더한 거여. 그리고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노래 불렀지.”
|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버리고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헌티 사인도 해드리고, 사진도 같이 찍지. 어느 날 지체 장애가 있는 친구가 왔더라고. 사진 찍는디 얘가 좋아서 몸을 막 부르르 떨고, 주체를 못하는 게 보이더라고. 어찌나 이쁘던지 꼭 껴안아줬어. 아무것도 아닌 이 노래 하나가 이 애한테는 큰 기쁨이라 생각이 들데.”
장사익 선생은 그의 노래 ‘우리는 서로 만나 무얼 버릴까’의 노랫말처럼 자신을 버리고 베풀 때 더 큰 행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노래를 부를 때 ‘노래로 음성 공양한다.’ 생각하며, 세상을 향하여 베풂을 실천한다. 그는 스스로를 ‘광대’라고 칭했다. 또 “‘기생氣生’이 되어가지고 사람들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이 내 역할이제.”라며 넉살스레 말했다.
“나는 내 이야기 하는데 사람들이 웃고 울고 감동하며 박수 쳐주시데.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세상 살아가는 거이 별반 다르지 않는 거 같텨. 내 노래가 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딴 사람들 경험이 내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이들 공감 되나봐.”
그는 자신의 노랫말을 모두 ‘시’라고 표현했다. 세상을 함축적으로 담아 전달하고 싶어서다. 시를 읊조리며 본인의 감정을 더해 음악을 만든다. 그의 대표곡인 ‘찔레꽃’은 잠실에 살던 시절 길가에 핀 장미들 사이 조그마하게 핀 찔레꽃을 보며 느낀 감정을 쓴 시다. ‘찔레꽃’의 가사는 표현이 화려하거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한 자 한 자에 장사익의 세상을 담았다.
“앞으로 10년 20년은 더 살아 노래할 것 같어유. 근데 그때쯤 되면 지금만치 소리는 안 나올 것 같고, 또 무슨 노래를 할까 생각이 드는디. 그때 내 코앞에 죽음이란 놈 마주하고 뭔 노래를 부를까 싶어. 또 내가 욕심이 많어유. 가수들 무대 위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도 무대 위에서 끝까지 노래하는 게 꿈이지.”
지난 해 성대에서 혹을 발견해 제거하는 수술을 했다. ‘이러다가 영영 소리를 못하는 게 아닌가.’ 막막하고 무서웠다. 삶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꽃인 듯 노래 부르던 순간이 눈물인 듯 주저앉았다. 쉬는 시간을 가졌다. 제 노래와 삶뿐만 아니라 세상을 다시 돌아보았다. 허리 굽고 눈 안 뵈어도 진심을 담아 노래하자 결심했다.
“요즘 바람은 좋은 노래 하나 만드는 건디 잘 안 나오네유. 나이가 들어서 마음만 바쁘고 머리서 잘 안 따라와. 사람들 모두 꿈이란 게 있잖아유. 물론 못 이룰 수도 있지만, 내 꿈이지, 정말 좋은 노래 만들어 부르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