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충남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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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벽화이야기] 충남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강호진
  • 승인 2017.05.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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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다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사진 : 최배문

불교는 애초부터 분할이나 위계位階로 나와 남을 가르고 밀어내는 일에 서툰 편이다. 세상의 구분과 배제의 경계를 허물고 지우는 방식으로 불교사상과 교단이 태동했음은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받아들인 간략한 방식이나 제자들의 다양한 출신계급을 보아도 잘 드러난다. 불교사상의 전개도 마찬가지다. 인도 초기불교부터 아비달마, 중관, 유식, 여래장, 중국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충하거나 대립하는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불교가 원융과 화합의 상징으로, 다시 말해 종교적 도그마가 희미한 미래지향적 종교로 높이 인식되어 왔다.

마곡사 대광보전에 그려진 벽화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교의 포용력과 넘나듦을 초월한다. 명부전의 시왕이나 칠성각의 별자리들은 도교의 신앙이 지장보살과 치성광여래의 권속이라는 변용 속에서 불교에 포섭된 것이지만, 비로자나를 모신 주불전에 그려진 여섯 명의 도교 신선 벽화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불자들에겐 이름도 낯선 이비체李鼻涕, 철괴선생, 하마선인 등의 여섯 신선들이 불전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 누군가 도교사원이냐고 물어보더라도 별달리 대꾸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중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불단 옆 세 신선들 가운데 중앙에 그려진 ‘하마선인도’이다. 남루한 옷을 걸친 봉두난발의 맨발 사내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 양팔을 벌리고 줄에 꿴 엽전 꾸러미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리가 셋인 두꺼비를 희롱하는 모습은 점잖게 앉아 중생을 굽어보는 비로자나불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마선인은 늘 두꺼비(하마, 蝦蟆)와 함께 등장하는 신선을 지칭하는데, ‘유해섬劉海蟾’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10세기 무렵인 중국 오대五代시절 북경에 살았던 실존인물이라고 하나 그 진위를 판별하긴 어렵다. 다만 명明나라 때부터 민간에 널리 알려져 행운과 재물을 불러오는 길상화로 많이 그려졌는데, 조선시대 심사정이 그린 ‘하마선인도’만 보아도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선인이 쥐고 있는 동전 꾸러미는 부富를 직접 나타내는 것 같고, 세 발 두꺼비는 재복을 부르는 영험한 동물이니 그림이 전달하는 상징성이 단순하고 명징한 것을 선호하는 대중들의 기호에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하마선인이 동전 꾸러미로 두꺼비를 희롱하는 모습은 재복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이는 툭하면 사라져버리는 두꺼비를 동전으로 꾀어내기 위한 것으로 그 이면에는 불교와 도교의 치열한 싸움이 숨겨져 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마선인이 우물가에 사는 석나한石羅漢이란 요괴와 싸워서 그가 지닌 일곱 닢의 동전과 보주를 회수하고 두꺼비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석나한’이란 이름의 ‘석石’은 승려들이 성性으로 삼는 석가모니의 ‘석釋’과 중국어 발음상 ‘shi’로 동일하고,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이니, 석나한과 싸워 이겼다고 함은 도교가 불교와 싸워서 이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도교 측에서 꾸며낸 것이지만, 내용으로 보았을 때 불전에 하마선인이 그려지는 것은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을 모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진정성과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당장 신선들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마곡사의 하마선인도가 지닌 역사성, 더 나아가 불교의 진의를 제대로 간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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