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한국의 禪을 심는 헝가리 원광사 청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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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한국의 禪을 심는 헝가리 원광사 청안 스님
  • 유윤정
  • 승인 2017.05.16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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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원광사 청안스님
 
 
 
헝가리에 지은 한국 전통사찰 원광사
청안 스님은 헝가리인이다. 그러니까 모국에 한국불교를 전하는 셈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 헝가리에 한국의 전통 사찰 양식을 그대로 살린 절을 지었다. 그리고 ‘원광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외에 한국식 사찰을 지은 것은 미국 태고사에 이어 두 번째, 유럽에서는 처음이다. 처음에는 의심 섞인 시선들이 많았다. 터를 잡고 2006년 첫 상량식을 할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은 뒤돌아서서 말했다.
 
“저게 되겠어?”
 
그런데 스님은 해냈다. 선방을 만들고 요사를 완성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마치 수행 공동체처럼 간화선 수행을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말했다.
 
“그 정도만 해도 대단한 거지. 완연한 사격을 다 갖추기는 어려울 거야.”
 
그런데 스님은 또 해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딱 이렇다. 
 
“스님이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냅니다.”
 
스님이 처음 헝가리 원광사 건립을 시작한 게 2006년. 딱 10년이 지났다. 그 어려운 걸 자꾸 해내고 나니 이제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입을 다물어버린 모양새다.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님은 늘 말한다. 불교라고는 티베트불교와 일본불교만이 조금 알려져 있을 뿐, 한국불교의 입장에서는 완벽한 불모지에 가까운 헝가리에 한국사찰을 짓는 일. 스님은 대체 왜 이런 원력을 세운 것일까.
 
“지금 유럽은 불교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수행을 원하는 인구도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이 불교 수행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유럽인들 중에는 출가수행을 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아요. 그들에게 한국불교의 선 문화를 전해준다면 분명히 눈여겨볼 만한 변화가 생길 거예요. 그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저는 제 고향인 헝가리에 한국불교를 심고 있는 거죠. 또 한국불교의 전통미를 살린 선방에서 간화선을 체험하는 것은 이미 유럽 전역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불교와 차별화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 될 수 있겠죠.”
 
자신의 원력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의 그 눈빛. 처음 원광사 불사를 위한 모금을 시작할 때였던 2005년이나 지금이나 청안 스님의 그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 존재의 본질에 대한 숭산 스님의 답
청안 스님이 한국불 교를 만난 것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어릴 적부터 존재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나는 무엇인가?’에서 시작된 질문은 번지고 번져서 ‘존재란 과연 무엇인가?’까지 확장됐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지만 아무도 납득할 만한 답을 주지 못했어요. 어떤 책을 보아도 철학자들의 말들은 내가 품은 질문을 겉돌기만 했어요.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는 종교인을 찾아가도 마찬가지였죠. 명쾌하지 않았어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니까 갈증이 느껴지더라고요.”
 
목마름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조지(George B.)가 젠(Zen, 禪)을 소개해줬다. 조지가 말하는 젠의 세계관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망설임 없이 그를 따라 ‘선 토론모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5월, 드디어 일생일대의 인연이 찾아왔다. 헝가리의 선불교 수행자들의 초청으로 한국의 숭산 스님이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도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입니까?”
 
“당신이 누구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존재란 무엇입니까?”
 
“모릅니다. 질문을 한 당신을 나는 모르고, 모른다고 답을 주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나도 모릅니다. ‘단지 모를 뿐’입니다. 당신이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단지 모를 뿐’이라는 걸 알고 나면 세상 무엇이든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모르지만, 저기 날아가는 저 새를 나는 ‘볼 뿐’입니다. 생각을 멈추세요. 생각을 멈춘 그 자리에 존재의 본질이 있습니다.”
 
숭산 스님은 예의 넉넉한 미소로 말했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쉬운 낱말을 모아 간결하게 답을 주었다. 숭산 스님의 답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막혀 있던 물꼬가 터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옥에서 벗어나는 듯한 안도감과 함께 한 순간에 모든 압박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맛볼 수 있었다. 그 길로 훗날 ‘청안淸眼’이라는 법명을 받게 될 헝가리 청년은 숭산 스님을 좇아 미국 프로비던스 선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2년여 간의 안거 수행을 체험한 뒤 1994년 마침내 정식으로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 수행자의 길에서 전법의 길로
청안 스님은 숭산 스님과 처음 만났던 그날 이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했다. 출가 후에는 출가자의 본본에 충실하고자 했다. 몇 년의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며 간화선 수행에 몰두했고, 당시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 없는 푸른 눈의 스님으로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출가 전에 부다페스트에서 3일 동안 처음으로 명상수행을 한 적이 있었어요. 유럽인들은 평생 양반다리를 할 일이 없거든요.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하는데 무릎이 너무 아파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는 수행자들이 석 달씩 이렇게 앉아서 수행에만 집중한다는 걸 도저히 믿기 어려웠어요. 그때 명상을 가르쳐주던 분이 그러더군요. 한 2년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물론 지금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간화선에 몰두하는 게 가장 편안합니다.”
 
스님의 표정은 늘 맑다. 언제 어떤 순간이든 웃음을 잃지 않으려 한다. 얼굴은 마음의 상태를 비춰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늘 수행자로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이것이 미소로 드러나는 셈이다. 출가 후 한국에서 보냈던 그 몇 년의 시간들이 청안 스님의 삶에서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그러던 그가 다시 헝가리로 돌아가게 된 것은 은사인 숭산 스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숭산 스님은 청안 스님에게 유럽에 한국불교를 전하라는 소임을 맡겼다. 스승의 뜻을 전달받은 청안 스님은 망설임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시 돌아온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청안 스님은 전법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막막한 순간들이 이어졌지만, 한국불교에 대한 그의 믿음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처음 터를 잡은 곳은 집시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다. 지역의 특성상 상존하는 위험요소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선 센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확연히 늘어난 2003년, 청안 스님은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엄청난 수는 아니지만 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한 번은 체코의 농가를 빌려 1주일 간격으로 석 달간 동안거를 열었는데, 당시 참가한 인원만 100명이 훌쩍 넘었다. 유럽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용맹정진의 시간. 그네들에게는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을 게다. 그럼에도 화두의 세계는 헝가리 인들을 매료시켜 나갔다. 청안 스님이 오랫동안 생각해오던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 것이 그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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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10년, 2단계 불사가 시작됐다
“스님은 포교와 전법을 위해 도심에 기거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수행자라면 마땅히 산사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산사는 출가자들에게 온전한 수행의 공간이 되고, 재가 수행자들은 한 번씩 수행을 위해 교외의 산사를 찾아 자아를 참구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겠지요. 이런 문화는 유럽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요. 한국불교만이 유럽에 전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수행문화 아닐까요?”
 
충분히 유럽에 먹힐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기자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원광사를 건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을 시작하고, 한국불교계에 원광사 건립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사이사이 한국식 전통사찰을 건립할 부지를 찾아다녔다. 반드시 ‘산사’여야 한다. 나침반을 들고 부다페스트 인근의 산속을 헤매고 다니길 수차례. 마침내 눈에 들어오는 곳이 있었다.
 
“산사를 지을 자리를 찾기 위해 풍수지리까지 공부해서 일일이 따져봤어요. 그런데 적당한 곳이 생각보다 없더라고요. 지금의 원광사 자리는 정말 우연치 않게 발견했어요. 원래 예정했던 지역을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발견했죠. 문제는 이곳을 어떻게 얻어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어요. 약 9,900㎡(3,000여 평)의 부지였는데, 이곳을 매입하기 위해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책을 내서 인세를 모두 쏟아 붓고 기금을 조성해 어렵게 매입을 할 수 있었죠.”
 
하나의 고비를 넘었지만 가시밭길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한국식 전통사찰을 짓기 위해서는 한옥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헝가리 목수 두 명을 데리고 한국에 들어와 진주에서 한옥건축을 일일이 가르쳤다. 본격적인 사찰 건립을 위해 산속에 텐트를 치고 먹고 자면서, 스님은 목수들과 함께 선방의 구들장을 놓아 온돌을 만들고 기와 한 장까지 직접 올렸다. 휑한 사찰부지에서 원광사 선방의 상량식을 열던 날,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과 여러 도반스님, 한국의 불자들이 헝가리까지 날아와 함께 해주었다. 그날 그 분들의 축원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원광사의 첫 상량식을 지낸 게 벌써 정확히 10년 전이에요. 2006년 11월 11일, 그날은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입니다. 그 사이에 선방과 요사를 비롯한 건물을 여러 동 올렸어요. 하지만 대웅전을 비롯해서 전통사찰의 사격을 갖출 수 있는 건물들은 이제부터 지어야 합니다. 원광사의 상량식 이후 10년 만에 2단계 불사를 시작하게 된 거죠. 이제부터 또 다른 시작입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청안 스님은 원광사가 여법한 사격만 갖추게 되면, 분명히 유럽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큰 산을 하나 넘고 다시 두 번째 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선 스님의 원력은 아직 굳건하다. 스님의 푸른 눈이 향하고 있는 미래, 한국불교가 새롭게 열어갈 유럽 속 선 수행열풍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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