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교정교화전법단 사무국장 지일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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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인터뷰] 교정교화전법단 사무국장 지일 스님
  • 유윤정
  • 승인 2017.05.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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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을 건지기 위해 아흔아홉 명을 먹입니다.”

“한 명을 건지기 위해 

 아흔아홉 명을 먹입니다.”
 
교정교화전법단 
사무국장 지일 스님
 
차갑고 육중한 철창문이 지일 스님의 등 뒤로 쿵, 하고 닫혔다. 뻣뻣하게 주름 잡힌 제복을 입은 교도관이 하얀색 쇠창살문을 철커덕 연다. 장삼 자락 펄럭이며, 몇 개인지 세다 잊어버린 철창문을 지나 복도를 가로질러 큰 강당에 들어섰다. 오늘 이 강당이 재소자들을 위해 수계법회를 열 계단戒壇이다. 10월 5일, 경남 밀양구치소 수용불자 수계법회. 100여 명이 차곡하게 앉아 있는 강당에서 유나維那와 인례引禮를 맡은 지일 스님이 마이크를 들었다. “이제 이 앞에 계신 아홉 분은 오계를 받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오늘은 처음 살아보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실수해서 이곳에 있지만 앞으로 나가서는 실수하면서 살지 않도록 합시다.” 무릎을 꿇고 앉은 9명의 수계자와 그 뒤에 앉아 있던 푸른 면의를 입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며 가만히 가슴 앞으로 두 손을 모았다. 밀양에서 교정교화전법단 사무국장 지일 스님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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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를 발심했던 이유, 바로 포교
구치소에서 나오는 지일 스님의 얼굴에 말간 미소가 떠올랐다. 교정시설 포교는 군 포교와 함께 포교 중에서도 힘든 포교로 손꼽힌다. 두 발로 찾아가야 하는 곳, 끊임없는 자비행과 보시가 이뤄져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일 스님은 그 어렵다는 포교를 양팔 걷고 도맡아 한다. 스님이 의정부 교도소 법회의 지도 법사를 맡은 것이 10년, 교정교화전법단의 사무국장을 맡은 지도 5년째다. 인터뷰를 하던 날 봉행한 밀양구치소 수계법회도 교정교화전법단의 주최로 이뤄진 법회였다. 교정교화뿐만 아니라 군승이 배치되지 못한 군법당에서 장병들의 불심을 키우는 주지 소임을 산 지도 벌써 8년이다. 언젠가 누군가가 물었다. “스님은 왜 포교 중에서도 어렵다는 것만 일부러 찾아다니시면서 하십니까?” 스님은 답했다. “제가 출가를 발심했던 이유가 바로 포교였습니다. 포교하려고 출가를 했으니 포교하러 가야지요.”
 
- 포교를 위해 출가하셨다고요.
 
“제가 늦깎이에요. 30대 후반에 출가했습니다. 출가 전에는 법주사 근처 작은 사찰에서 어린이 법회 지도 교사를 했었어요. 어린이, 청소년. 그 아이들한테 불교를 심어주는 것에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재가자로 살면서 내 역할에 맞춰 잘 포교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1대 1로 사람을 만나도 불교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불자인지 모르잖아요. 그런데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있으면 누가 봐도 저를 스님으로 볼 거예요. 저를 보는 사람은 보기만 해도 불교라는 인연이 심어지는 거죠. 그러면 1대 1로, 낚시질로 포교를 할 것이 아니라 그물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포교를 하겠다고 출가하셨는데, 그 포교를 교정시설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포교를 해야겠다, 다짐하고 출가를 하면서 ‘그렇다면 어느 곳의 포교에 집중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세 곳이었습니다. 호스피스, 교도소, 군대입니다.”
 
- 저 세 곳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죠?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나를 찾아올 수 없는 곳이에요. 일반 사람들은 언제든 절에 찾아갈 수 있지요. 힘들면 찾아와서 스님을 붙잡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런데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은 사찰에 찾아갈 수 없어요.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 군인들 마찬가집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어쩌면 불교와는 전혀 인연이 닿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그들에게 불교와 인연을 닿게 해주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 찾아가기 시작했어요. 그들에게 부처님 법이라는 작은 씨앗을 하나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           먼지 묻은 채로 데려오라
교정교화전법단은 2011년 1월 20일 출범했다. 전국에 있는 포교사들과 각 지역에 있는 교정시설들을 서로 잘 연계시켜 법회를 진행하고, 포교할 수 있도록 돕는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 소속이다. 전국 42개 교도소, 11개 구치소. 포교사들의 여력만으로는 어려운 일들을 함께 맡는다. 포교사들이 자기 돈으로 법요집을 사서 법회를 여는 실정에 교정교화용 법요집을 만들었다. 수계첩과 수계복도 제작했다. 생활사범 등 안타까운 사정을 가지고 있는 불자 재소자들을 위해 약소하게나마 영치금도 따로 마련했다. 그들도 다 같은 부처님 제자이기 때문이다. 지일 스님은 교정교화전법단이 창단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무국장을 맡았다. 스님의 도움을 부탁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든 갔다. 재소자 7명을 위해 강원도에서 청주까지 3시간을 달려와 짧은 법회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이들이 단박에 불자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그저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 재소자 대상 법회는 일반 법회와는 다른가요?
 
“똑같아요. 입정하고 법회하고 법문하고. 다를 게 없어요.”
 
- 스님께서 교정교화전법단 이전부터 재소자 대상 법회를 진행하신 것이 10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안에 계신 분들의 변화를 체감하신 적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지요. 확실한 것은 재범률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타 종교에 비해서 불교가 재범률이 월등히 낮아요. 이분들 마음에 많은 교화가 일어나는 것이죠. 우리 불교가 이분들을 대상으로 힘써 포교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재범률을 낮추기 위해서도 재소자 포교에 힘써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 사람이 다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그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재소자 포교를 해야 해요. 사실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첫 번째 피해자는 내가 아니에요. 그분들은 들어와 있고, 그 피해자가 나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피해자는 나와 내 가족, 내 인연이 닿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첫 번째는 막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재소자 포교를 하면, 두 번째는 잘 하면 막을 수 있잖아요. 모든 것은 반복하면 강해져요. 힘이 생기고 강해져요. 재범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엔 약하게 시작했지만, 두 번째는 규모가 커져요. 우리가 가서 그들을 만나 부처님 가르침을 잘 전하면 그거 한 번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스님께서 그분들에게 포교를 함으로써 그들의 교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군요.
 
“교화는 그들이 만들어내죠. 많은 사람들이 포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먼지를 푹 뒤집어 쓴 사람 데려다가 싹 씻겨서 새 옷 입혀 데려다 놓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람을 순식간에 싹 바꿔버리는 것이요. 그런데 선근이 있는 사람도 스스로를 믿고 부처님 가르침 의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기가 쉽지 않아요. 하물며 불교를 생판 모르는 사람을 바꾸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지요. 부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도, 부처님 직접 만나고도 교화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 그렇다면 스님이 생각하시는 포교는 어떤 것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포교는 먼지 묻어 있는 채로 데려오는 것입니다. 먼지 묻은 채로 보아주는 것이요. 제가 뭘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인연을 맺게 해주고, 스스로가 하나씩 먼지를 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 나는 이게 옷에 붙은 장식인 줄 알았더니 아니네.’ ‘이게 무늬인 줄 알았더니 때였네.’ 하면서 스스로 때를 벗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요. 자기 스스로 할 수 있게끔 계속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는 것이 포교라고 생각합니다.”
 
- 스스로 바뀔 수 있도록 돕고 지켜봐주는 것이 포교란 말씀이군요.
 
“우리가 부처님처럼 한마디 해서 그 사람이 찌리릿 하고 바뀌기는 어려워요. 계를 받은 사람들도 ‘오늘 수계를 받았으니 앞으로 180도 바뀌어야지.’라고 하기엔 어렵죠. 다만 ‘아, 이거는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 부처님 이거 이번 한 번만 할게요.’ 하면서 끊임없이 부처님 영향을 받고 부처님 눈치 볼 수 있는 마음을 알려주는 것이 포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궁극에는 나 스스로가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지요.”
 
|           아낌없이 주면 될 일이다
- 스님께서는 군포교도 열심히 하시잖아요.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요?
 
“11월이 되면 대전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있겠네요. 지금까지는 육군 5군단 1기갑여단 기갑호국사에 주지로 있었어요. 2년만 있겠다고 은사스님께 말씀드리고 왔는데, 8년의 세월이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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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승 중에 비구니스님은 세 분이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민간인 성직자입니다. 손이 모자라 군승이 배치되지 못한 군법당들이 있어요. 군종교구에서 그런 곳들에 스님들을 민간인 성직자로 위촉합니다. 여기서 민간인은 군인이 아니라는 의미예요. 2008년 6월에 그 당시 군종교구장인 일면 스님께 위촉받았어요. 그래서 군 장병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고 장병들의 불심을 함께 키우죠.”
 
2008년, 우연한 인연으로 포천의 군법당을 찾아갔다. 일요일이었다. 군종병 네댓이 법회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혹시 지금 법당에 가서 참배할 수 있을까요?” 군종병들이 열쇠를 꺼내어 법당 문을 딱 열었다. 곰팡이 냄새가 훅하고 코를 찔렀다.
 
“천정을 보니까 등은 다 떨어지고, 비가 샌 자국이 선명했어요. 상단에 가니 부처님 상호가 정말 좋은데, 먼지 때문에 보이질 않아요. 거미들이 이곳저곳 그네를 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처님 맞은편에 큰 기둥이 있어요. 불교를 처음 접하는 20대 청년들이 여기에서 법회를 본대. 너무 기가 막히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젊은 청년들이 걸개에 삼귀의를 적어 한 장씩 넘기면서 법회를 보고 있는 거예요.”
 
보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보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거리가 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법회는 볼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그 법당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법당에 기거하면서 고쳐야 고쳐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은사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2년만 다녀오겠습니다.” 그 길로 수중에 있던 70만원을 들고 군법당으로 향했다. 매일 법당 한가운데에 앉아서 고민했다. ‘저기를 어떻게 고칠까,’ ‘장병들한테는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할까.’ 매일 밤이면 잠이 오질 않았다. 
“그 법당이 기갑호국사입니다. 그때는 도반스님들한테 부탁해서 보시 받고, 포천에 심원사, 자인사 이런 절에 가서 재 지내고 나온 과자 가져와서 아이들 나눠주면서 어떻게 꾸려야 할지 고민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 기도하면 어떻게든 다 돼요. 그해 비가 많이 와서 산이 무너져 흙이 법당을 상하게 했습니다. 군단에서 홍수피해 지원금을 받아 3년여에 걸쳐 법당을 다시 재정비했어요.”
 
스님이 하나둘씩 사찰을 정비를 하며 장병을 위한 법회를 열자, 찾아오는 장병들이 매주 늘었다. 40~50명이 되고, 70명이 되고, 100명이 됐다. 이제는 매주 180여 명이 법회에 참석한다. 장병들이 너무 많이 올 땐 법당 밖에서 맞이하기도 했다. 군장병들은 제대하고서도 스님과의 인연이 계속 됐다. 해마다 전역한 친구들이 타종식과 부처님 오신 날에 스님을 찾아왔다. 군대 시절을 생각하면 다시 오고 싶지 않을 장소이건만, 스님을 만나러 포천행 버스를 탔다. 전역한 군종병들은 매달 조금씩 보시금을 모아 보냈다. “스님을 엄마처럼 생각했다.”던 한 군종병은, 제대 후에 스님께 여자친구를 데리고 와 소개도 시켰다. 
 
- 군 포교에도 깊이 신경 쓰는 이유가 있나요?
 
“젊음이 좋은 이유가 뭔지 아세요? 한번 마음에 찍히면 잘 안 잊어버려요. 젊을 때 가슴속에 찍은 건 잘 안 잊어버리잖아. 세상을 알기 전에 낚아야 해요.(웃음) 이 시기를 놓치고 나면, 40대, 세상 다 살아보고 오는 때밖에 없어요. 결혼이라는 게 해서 좋은 줄 알았더니 별 볼 일 없고. 새끼라는 게 나오면 좋을 줄 알았더니 속 썩이는 덩어리고. 사업은 잘 되기는커녕 빚만 늘어나고. 인생 쓴맛 다 보고 난 다음에 불교가 마음에 들어오지요. 조금이라도 일찍 부처님 법을 접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 젊은 군인들을 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군대에 오면 좋든 싫든 종교를 가져야 해요. 신병교육대 가면 4주 동안 한두 군데씩 종교시설에 가보라고 하거든요. 단 한 번이라도 절에 와서 부처님을 만났을 때 좋은 이미지를 느끼는 것이 필요하죠. 그리고 이곳은 먹이가 곧 총알이에요. 하하. 한 명을 건지기 위해서 아흔아홉 명을 먹이는 거예요. 그 중에 하나만 제대로 불심이 생겨도 제대로 건지는 거지요. 정말로 좋은 건 한 해에 한 친구는 꼭 진짜 괜찮은 친구들이 나와요. 그런 친구들 건지는 맛에 하죠.”
 
젊은 장병 청년들을 포교하는 일도 결국엔 아낌없이 주면 될 일이다. 스님은 1년에 두 번씩 장병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장학금은 부처님 오신 날 보시금으로 마련했다. 보시금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부임한 첫해 부처님 오신 날 연등 보시금이 180만 원이었다. 일반 사찰에선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액수다. 그때 스님은 전역하면 갈 곳이 없던 군종병에게 장학금 100만원을 줬다. 그 군종병을 시작으로 총 15명에게 장학금을 줬다. 혹여나 주변에서 포교에 쓰라고 작은 액수라도 보시를 받으면 어김없이 병사들을 위해 내놓았다. 어김없이 그들을 위해, 포교를 위해 쓴다. 
 
지일 스님은 2015년 5월 9일, 교정교화전법단 출범 4주년 기념 법회에서 수용자를 위한 포교에 기여한 공로로 총무원장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27일, 47주년 군승의 날을 맞아 육군 1기갑여단 기갑호국사 주지로서 군종교구장상을 받았다. 2014년에는 100명의 장기기증을 추천하면 오를 수 있는 생명나눔실천본부 제 16호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           불퇴전에 오르게 해주십시오
- 포교를 위해서 출가하셨다고 했습니다. 불교계에서 교정교화 전법, 군 포교를 같이 하고, 장기기증, 생명 나눔에 대한 실천도 전파하고 계시죠. 혹시 그 밖에도 더 힘써서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 있으십니까?
 
“이것들 끝까지 끌고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지금 하는 것들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힘들 때 너무 많아요. 그럴 때 제 법명을 다시 떠올립니다. 제가 ‘지일’이란 법명을 받을 때요, 법명을 지어주신 지묵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흔아홉 번 참으려거든 그 이름 쓰지 마라. 백 번을 다 참으려면 그 이름을 써라.’ 제가 출가해서 처음 기도를 하면서 ‘부처님, 저는 앞으로 나아가는 거 바라지 않을게요. 뒤로 물러나지만 않게 해주세요.’ 했어요. ‘부처님, 제가 선택한 모든 것을 행할 때, 내가 더 잘 되고, 더 낫게 해달라고 바라지 않을게요. 대신 한 발자국도 밀리지 않게 해주세요. 부처님, 지금 이 신심이 물러나지 않게 해주세요. 아무리 거센 폭풍이 와도 뒤로 물러나지 않게 해주세요.’ 했습니다.”
 
- 아흔아홉 번에서 한 번을 더 참으시는 거군요.
 
“내가 여기서 딱 포기하면, 99번 참은 거예요. 흔히 남자 여자 사이, 부부지간에 싸울 때 ‘내가 말이야, 당신이 이렇게 저렇게 이야기해도 참았는데, 이번만은 못 참아.’ 하고 이야기하죠. 그건 못 참은 거예요. 아흔아홉 번에 한 번을 못 채우면 안 한 게 되는 거예요. 도로아미타불. 하나도 안 한 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것 하나를 마지막으로 채우고 나면, 채웠다 말았다 할 것도 없는 거죠. 이제는 그게 생활이에요. 했다 말았다 하는 것도 없어요.”
 
- 10년 후에 지일 스님은 어떤 모습일까요?
 
“10년 후면 60대이겠네요. 아직은 덜 익었어요. 더 잘 익고 싶어요. 수행자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모습을 보는 이나, 보리마음 모두 내고, 윤회 고를 벗어날제,’ 이게 제 소원이에요. 10년 안에는 어렵겠죠. 죽기 전까진 하고 싶은 것입니다. 10년 후에도 제 건강이 허락된다면 이 일을 계속 할 거예요. 만일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제가 할 수 있는 수행으로, 인연 닿는 한 수행하며 마무리를 하고 싶어요. 그때는 구태여 제가 말을 하지 않아도 눈빛만 줘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달라이 라마 성하 같은 수행력이 생겼으면 하고 바랍니다.”
 
스님과 대화를 마치고 밖을 나오니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어두운데 어쩌나. 밤길 살펴가며 조심히 올라가세요.” 하며 두 손을 꼭 포개어 맞잡아주었다. 스님의 손은 도탑고 따뜻했다. 새카만 밤하늘에 말간 달이 오솔길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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