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강화 마니산 정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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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강화 마니산 정수사
  • 이광이
  • 승인 2017.05.1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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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서서 기다리면 바다 멀리서 그리운 이가찾아오는 곳

멈춰서서 기다리면 바다 멀리서 그리운 이가찾아오는 곳

강화 마니산 정수사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모습을 지켜볼 틈도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인가(What is this life?)’

영국 시인 헨리 데이비스는 그렇게 묻는다. 개암은 ‘nuts’를 옮긴 말이다. 도토리처럼 생겼지만, 밤 맛이 난다. ‘가던 길 멈춰 서서’라는 이 시의 다음 구절도 아름답다.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시는 그런 식으로 몇 차례 묻는다.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를 지켜보거나,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인다. 너무나 쉬운 일이어서 하찮거나 다음으로 미뤄도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매우 어렵다. 언제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숲길을 걷다가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걷는 소리를 먼저 듣고, 다람쥐는 내 눈에 띄기 전에 사라진다. 강물은 해가 비칠 때마다 반짝이지만, 그것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인다는 생각은 그냥 오지 않는다. 숲에서 다람쥐를 보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춰야 한다. 둘이 맞닥뜨리기 한참 전부터 나무처럼 서서 기다려야 한다. 

멈춤과 기다림이 다람쥐를 만나기 위한 조건이다. 사진가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눈꽃을 찍기 위해 겨울 새벽 상고대에서 덜덜 떨며 일출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조건이다. 멈추는 것은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가다가 멈출 수 있는 것은 가는 값과 멈추는 값이 같아야 가능하다. 오늘 산의 정상까지 오른다거나, 호수를 세 바퀴 돌아야 한다면 멈출 수 없다. 그 목적을 향해 가야 하고, 다람쥐는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을 멈출 때 비로소 몸이 멈춘다. 

틱낫한 스님이 말한 ‘목적 없음(aimlessness)’! 목적이 사라져야 멈출 수 있다. 다람쥐는 그제야 나타날 것이다. 숲길을 걷다가 가만히 멈춰 서서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추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여유를 갖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시인은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그만한 일에 인생을 통째로 걸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마니산 정수사에 간다. 보문사, 전등사와 함께 강화의 3대 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하여 ‘정수사精修寺’라 불리던 것을 함허 대사가 ‘정수사淨水寺’로 바꿨다. 깨끗이 닦는 것도 정수고, 맑은 물도 정수다. 절 뒤편으로 올라가면 함허 대사 승탑이 있다.

작고 단순하지만, 단단하고 기품이 있다. 소나무 한 그루가 방산方繖처럼 뒤에서 받치고 있다.

돌로 지은 뼈의 무덤, 승려의 한 생은 이런 그릇에 담겨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정수사는 대웅보전(보물161호) 꽃살문이 유명하다.

문짝이 10개인데, 좌우 3개씩은 우물 정井 자 문양이고, 가운데 4짝이 꽃살문이다. 꽃을 조각하여 맞춘 것이 아니고, 문짝을 하나씩 통째로 투각했다. 중앙(御間) 2짝은 연꽃이고, 오른쪽은 국화, 왼쪽은 모란이다.

4개의 화병에 담긴 꽃이 문 가득 피어 화려하고 아름답다. 어디 멋 부린 데 없는 맞배지붕 아래, 꽃무늬 스카프를 두른 것 같다고 했더니, 총무소임을 맡고 있는 종원 스님이 웃는다.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 신심을 표현한 것인데, 멋지지 않습니까?”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는 듯합니다. 스님, 그런데 꽃병의 꽃은 시들지 않는가요?”
 
“안 시드는 것이 있겠습니까? 아침 햇빛이 꽃살문을 비추면 대단합니다. 저녁에 시든 꽃이 아침에 새롭게 피어나는 듯합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법당으로 이끄는 힘이 있지요.”
 
작년 봄 마니산에 산불이 났는데, 불길이 절 쪽으로 올까봐 사부대중이 달려들어 불상 옮기고, 바로 문짝을 떼어냈을 만큼, 꽃살문은 정수사의 보물이다. 대웅보전은 마루가 있어 특이하다.
 
마니산 참성단은 고려와 조선의 국가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거기 참여하지 못한 왕족 여자들이 머무르기 위해 그런 궁궐 구조를 갖춘 것 같다고 스님은 설명했다. 

종원 스님은 2009년 태동한 ‘청정승가를 위한 대중결사’ 사무처장을 지냈다. 불교 집안에서 드물게 사회참여가 활발하고, 진보적 색채를 띠는 단체였다. 그해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이 일어나던 해여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노제를 준비하고, 참여했었다고 한다. “노무현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시대가 그 그릇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내친 김에 불교의 문제점을 물었다. 답은 역설적이게도 “양극화”였다.

“그것을 빈부라고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한국불교의 양극화는 사회보다 더 심각합니다. 가난이 수행자의 본분이라 흉은 아니지요. 그러나 아파도 병원에 못 갈 정도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복지가 있나요, 뭐가 있나요? 스님들 90%가 그렇게 살 겁니다. 문제는 넉넉한 쪽의 ‘공심公心’입니다.”

“공심은 자비인가요?”

“본래 비어 있는 마음,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 출가할 때 챙겨 나온 초발심 같은 거겠지요. 우리는 늘 중도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어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뭔가 옮겨가면 바로 균형이 찾아지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지혜라는 것이 어디 소중한 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불교의 문제점에 대한 해답은 역시 불교 안에 있는 것이고, 나중 문제에 대한 해답은 역시 처음에 있는 것이고, 깨달음이 깨닫고 보면 공한 것이듯이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지혜라고 말했다. 

“지혜는 쉬워요. 길을 막고 물어보라고 하잖아요? 제3자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지요. 사람이 지혜롭다는 것은 뭘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 있느냐의 문제에요.”

제3자의 지혜는 쉽다. 당사자가 어렵다. 제3자는 당사자라는 굴레가 없고, 손익과 무관한 사람이어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사자는 시비가 붙은 사람이다. 이미 주관 속에 빠져 있고, 어떤 목적과 이익을 위해 다툼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다. 흐릿한 안경을 쓰고 셈을 하는 사람과, 안경을 벗고 무심을 유지하는 사람의 판단은 다를 것이다. 당사자이면서 당사자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당사자이면서 제3자의 입장을 가지려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재물이든, 명예든, 욕망이든, 모두 ‘목적’이라는 이름 안에 들어 있는 것들, 그것을 무심코 버릴 때 지혜가 생겨나고 한 지평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따져 묻는 것, 틱낫한의 ‘목적 없음’, 그리고 부처의 ‘반야바라밀’이 매양 한가지다.  

나는 ‘가던 길 멈춰 서서’라는 시의 끝부분을 제일 좋아한다.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그 발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나도 거기서는 시인처럼, ‘그것이 무슨 인생이냐’고 말할 수 있다. 다람쥐와 강물의 여유는 잃어버렸을지라도, ‘춤추는 여인의 입술로 번지는 미소’는 누구보다 더 길고 오랫동안 지켜볼 여유를 아직 잃지는 않고 있으므로.                       

 

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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