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방랑기] 강원도 영월 금몽암, 보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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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방랑기] 강원도 영월 금몽암, 보덕사
  • 월간 불광
  • 승인 2017.04.1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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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에 떠난 단종이 왜 산신각에 앉아있을까?

강원도 영월 금몽암, 보덕사
 
영월 가는 길에 눈이 내렸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은 아니고, 작은 솜털들이 바람 따라 흩날리는 정도였다. 때가 되면 오는 것이 눈이지만, 눈은 그때마다 아련하고 애잔한 마음을 일으킨다. 눈이 내려 희미하게 보이는 세상은 기억이 감퇴하여 가물거리는 과거와 닮았다. 어느 정도 지워져버렸으므로, 눈이 내릴 때는 추억하고 혼동하고 상상하기 좋다. 죽은 것도 살아오고,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것이 옛날 언젠가 보았던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멍한 추상이 다가오게 열어두는 시간들, 이제 막 끝난 프랑스 영화의 자막이 제 알아서 올라가도록 느긋하게 바라보는 순간들을 눈이 올 때 맞이하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지금 가는 금몽암과 보덕사는 단종의 원찰이다. 저렇게 날리는 눈과 단종의 짧은 생애는 어딘가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월에 가기로 정하고 내내 궁금했던 것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군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그 서러운 삶의 족적이 아니라, 그 팔자는 어찌 된 것이며, 그런 것을 불교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할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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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은 1441년 왕손(세종의 손자)으로 태어났다. 출생 사흘 만에 생모(현덕왕후)가 산욕열로 죽었다. 5살 때 할머니(소헌왕후)가 죽었고, 9살 때 할아버지(세종)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죽자, 아버지는 왕이 되었고, 아들은 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문종)는 2년 뒤, 아들이 11살 되던 해에 죽었다. 단종은 초등학교 4학년 나이에 왕이 되었다. 재위는 3년 2개월. 수렴청정할 대비도 대왕대비도 없었다. 14살 때, 자신보다 24살 많은 숙부의 상왕이 되었다. 16살 여름에 영월로 유배되었고, 그해 가을 청령포에 사약이 도착하기 전에 자살했다.
 
사람들이 배를 타고 청령포로 들어가고 있다. 누가 단종의 유배지로 청령포를 생각해 냈을까? 깊고 푸른 서강西江이 삼면에 흐르고, 서남쪽으로 절벽 같은 산이 가로막고 있는 청령포는 내시의 그것처럼 생긴 천연의 감옥이다. 단종이 ‘육지고도陸地孤島’라고 표현했다는 이곳에는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 부인(정순왕후)을 그리워하며 쌓았다는 돌탑, 슬픈 옛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수백 년 된 소나무 숲이 남아 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솔잎에 쌓인 눈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꽃가루 같기도 하고, 뼛가루 같기도 한, 눈의 작은 입자들이 단종어가의 지붕 위로, 돌담 위로, 얇은 장막을 친 것처럼 흩날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물기가 있어야 사는 거라. 그것을 윤습潤濕이라고 하잖아요? 젖고 축축하다는 뜻이지. 땅이 물러야 뿌리를 내리고 살지. 마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나? 이치가 그렇지 않어?”
 
금몽암 암주 인보 스님은 그렇게 말했다. 단종의 팔자에 윤습이 없다는 것이다. 일흔여섯의 노스님은 단종의 요절에 각박하고 메마른 천운을 얘기했다. 금몽암禁夢庵은 태백산이 양손을 벌려 감싸 안은 듯한, 바람도 잦아든 보금자리에 깃들어 있다.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어 한 암자를 보았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한다. 금중은 궁궐이다. 단종은 꿈에 본 암자를 잊지 못하다가 영월 유배 중에 이곳에 들렀는데, 이곳이 그곳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금몽암은 단종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암자의 태생 자체가 단종과 뗄 수 없는 인연이다. 금몽암은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기까지 241년 동안 그의 영혼을 위로하는 영산재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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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단종 누이(경혜공주)의 삶도 기구합니다. 시집가던 해에 세종이 죽어 조부 삼년상 치르고, 다시 아버지 삼년상 치르고, 동생 죽고, 남편은 역모로 능지처참 되고, 본인은 노비가 되었잖습니까? 그 뒤에 사면을 받아 비구니스님이 되었더라고요.”
 
“불가의 인연이 깊습니다. 명운을 따질 때 그런 말이 있지요. 그 사람의 요절을 어찌 아는가? 기탁신고氣濁神枯 아니겠는가. 기운은 탁하고 신은 메마르니, 부러지는 것이고, 일찍 떠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불교적으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내가 뭐 아는 것이 있나? 인과론으로 보자면, 세조는 이 세상에 빚을 받으러 온 사람이고, 단종은 이 세상에 빚을 갚으러 온 사람이라고 할까? 피할 수 있는 것이 운명運命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 숙명宿命이라고 하잖어? 열여섯에 제 힘으로 피할 수 있었을까?” 
 
꽁꽁 얼어붙은 겨울 암자는 저녁 공양이 끝나자 벌써 삼중이다. 이른 새벽에 노스님은 혼자서 도량석을 하고, 예불을 올렸다. 나는 감기 때문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누워서 목탁과 독경소리를 듣는 것이 미안했다. 아침 공양도 거르고, 우리는 금몽암에서 스님께 합장하고, 700m 아래 보덕사報德寺로 내려왔다. 월정사 말사인 보덕사는 단종이 묻힌 장릉莊陵 바로 옆에 있다. 1457년 단종 유배 당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이름을 따서 한때 ‘노릉사魯陵寺’로 불렸을 만큼 단종과 인연이 깊다. 경내에 단종을 추모하는 비각을 따로 지어 매년 거기서 영산대재를 지내고 있다. 그러니까 단종 복위 이전에는 금몽암이 원찰이었고, 복위 이후에는 보덕사가 원찰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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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사에서 만난 한 스님은 산신각에서 단종을 봤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물으려던 참이었다. 단종비각이 따로 있는데 왜 산신각에 백마를 타고 있는 단종의 그림을 모셔 두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저기 장릉을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고 있지요? 단순한 관광객이 아니에요. 참배객입니다. 단종을 생각하며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올라갑니다. 단종의 슬픈 생애가 나의 처지와 합일되는 거예요. 내가 외롭고 힘들 때, 나보다 더 외롭고 힘든 사람을 만나면 위안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능 앞에 서서 두 가지를 소망하죠. 하나는 단종을 향해, 하나는 자기를 위해.”
 
“단종은 산신이 되었네요?” 
 
“억울하게 죽은 단종이 신이 되었으면, 당연히 힘없고 억울한 백성들을 보살펴 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여기 사람들이 왜 어가행렬을 하는지 아세요? 조선 27대 왕 중에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하고, 왕으로 있으면서 한 번도 어가행렬을 못 해봐서 영월 주민들이 대신 해주는 거지요. 단종을 산신각에 모시고, 영산재를 올려 주는 것도 같은 뜻입니다.”
 
다른 시대를 산, 15세기의 임금과 21세기의 백성이 슬픔과 정한을 매개로 만나고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나는 왜 산신각이 절 안에 들어와 있는지, 그리고 그 산신각 안에 단종이 앉아 있는지 알 듯하다. 그것은 신과 사람의 만남이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기도 하고, 부처와 산신의 만남이기도 하고, 도교와 불교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남은 뭔가 애절한 것이 있을 때 더 깊어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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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을 하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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