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호특집] 백척간두에서 펄럭이는 전법의 깃발
상태바
[500호특집] 백척간두에서 펄럭이는 전법의 깃발
  • 서재영
  • 승인 2016.06.13 16: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전법의 종교와 월간 「불광」의 발자취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5비구에게 달려가 법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승단을 이루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도 전도선언을 하고 전법傳法을 떠나게 한 것이다.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순간도 백마에 불상과 경전을 싣고 오는 전법의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다. 심지어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지향하는 선종조차 초조를 ‘달마達磨’라고 부른다. ‘달마(Dharma)’란 곧 ‘법法’을 의미함으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즉 ‘달마가 서쪽에서 오신 뜻’은 법을 전하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전법傳法의 종교’이며, 불교사는 ‘전법傳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법의 종교로서 불교의 특징은 진리의 말씀을 널리 전하여 중생에게 해탈과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광덕 스님의 불광운동 역시 ‘전법으로 믿음을 삼겠다.’는 전법운동이었으며, 월간 「불광」은 그와 같은 전법의 전통과 원력으로 창간되었다.

1974년 가을 종로 대각사에서 창간이 착수된 「불광」은 그해 9월 광덕 스님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잡지 등록을 마치면서 창간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스님을 보필해 창간을 도운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후에 조계종 기본선원장을 지낸 지환 스님과 동국역경원에 재직했던 박경훈 선생이 편집자문을 맡았고, 지견 스님이 편집장을 맡아 실무를 진행했다. 제자題字는 여초 김응현 선생이 맡았지만 표지 디자인은 당시 이화여대 불교학생회장이, 홍보는 대불련 서울지부장이 맡는 등 청년 불자들까지 힘을 보탰다. 이렇게 해서 1974년 11월, 78쪽 짜리 「불광」 창간호가 탄생했다.

「불광」의 창간은 불교계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해 종정으로 취임한 서옹 스님, 전 종정 고암 스님, 통도사 조실 월하 스님 등 종단의 어른들은 축사를 보내 힘을 실어주었다. 특히 경봉 스님은 고령임에도 휘호와 함께 10회에 걸쳐 법어를 연재했다. 또 월주 스님, 고산 스님 등은 구독회원으로 힘을 보탰고, 동국대와 조계종 종립학교에서는 「불광」을 ‘교학법회’ 교재로, 전국의 주요사찰들도 포교지로 채택하며 전법지의 창간에 화답했다.

창간 초창기에는 재정난 등으로 매회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광」은 발전을 거듭했다. 1980년 1월 원색화보가 처음 등장했고, 2년 뒤에는 화보를 16면으로 증면한 데 이어 1984년에는 본문을 전면 가로쓰기로 전환했다. 2008년 1월 144면이던 지면을 160면으로 증면하였으며, 2012년 1월부터는 판형을 크라운판으로 확대하고 전면 4도 인쇄로 전환하여 이미지 시대에 부응하는 잡지로 변신했다.

그동안 「불광」은 교계 안팎으로부터 여러 차례 권위 있는 상을 수상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잡지로 성장해왔다. 1997년 ‘전국어린이부처님그림그리기 대회’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봉축위로부터 받은 특별상을 시작으로 2005년 포교사단의 감사패를 받고, 2012년에는 제10회 대원상(포교대상)을 수상함으로써 교계에서 전법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다.

「불광」에 대한 이런 평가는 교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94년 문공부 선정 우수 잡지 표창을 시작으로 2005년 한국잡지협회로부터 우수 잡지 표창을, 2010년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1년과 2013년 문체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선정됨으로써 대외적으로도 최고의 잡지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 불광운동의 발신자

광덕 스님은 「불광」을 ‘소리 없는 깃발’이라고 했다. 「불광」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전법의 깃발이며, 한 권의 「불광」을 한 사람의 전법사로 인식했던 것이다. 「불광」이 갖는 이런 위상과 역할 때문에 「불광」은 정보전달과 담론생산이라는 잡지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전법운동으로 확산되어 갔다.

「불광」을 읽은 독자들은 광덕 스님이 주관하는 대각사 법회로 모여 들면서 전법지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광덕 스님은 잡지만으로는 전법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스스로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기 위해서는 보다 실천적인 신행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5년 12월호에서 광덕 스님은 “행동으로 뛰어나오지 못하는 불법은 불법 이해의 지식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불광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 본성의 무한성을 소리 높이 외쳐왔지만 그것은 아직은 지상을 통한 절규 밖을 넘지 못했다.”고 술회하며 불광법회의 창립취지를 밝혔다. 이후 광덕 스님은 매주 목요일 대각사에서 야간법회를 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불광법회라는 신행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대각사 법회는 날이 갈수록 성장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불광」을 통해 꿈꾸어왔던 전법의 열정과 메시지는 소리 없는 깃발로 끝나지 않고 ‘도심전법’이라는 역동적 에너지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3 근대불교를 기획해온 불교잡지

혹자는 ‘근대불교를 기획하고 실현해간 동력은 8할이 불교잡지’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불교가 역경에 직면했을 때 각종 불교잡지가 발행되었다. 1912년 원종 종무원에서 발간하고 권상로 선생이 편집을 맡았던 「조선불교월보」가 발간된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20여 종에 달하는 불교잡지가 발간되었다.

근대불교의 산물로 등장한 불교잡지들은 단순히 불교를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다양한 개혁론과 불교의 비전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이 잡지들은 대부분 통권 10호 내외를 발간하다가 폐간하기를 되풀이했고, 100호 이상을 넘긴 잡지는 3개에 불과하다. 1924년 조선불교단에서 발간한 「조선불교」가 지령 121호로 제일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했다. 다음으로 역시 같은 해에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발간한 「불교」가 지령 108호로 뒤를 이었고, 1935년 불교시보사에서 발간한 「불교시보」가 지령 105호까지 발간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이들 불교잡지는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든다. 외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는 난관에 부딪치고, 내적으로는 불교정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불교잡지들은 이 시기에 명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불교잡지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부터이다. 1963년에 창간된 「법시」와 1968년에 창간된 「법륜」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 두 잡지는 비록 중간에 결호가 생기긴 했으나 90년대 초까지 발간되며 불교잡지의 명맥을 지켜왔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