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남대학교 철학과 이중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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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남대학교 철학과 이중표 교수
  • 불광출판사
  • 승인 2016.03.0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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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를 읽으면 숨어 있던 불교가 나타난다
이중표

교수연구동 내 그의 연구실은 책과 각종 자료로 둘러 싸여 있다. 그는 “천성이 잘 치우지 못합니다.”고 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연구실은 세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다. 내딛는 발끝에서 ‘삐걱’하고 소리가 났다. 얼핏 봐도 오래된 공간이다. 1989년에 당시로는 생소한 주제인 ‘아함의 중도체계 연구’로 동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문적 스승인 고익진 교수의 영향 때문이다. 이후 이곳 전남대 철학과에서 ‘아함’을 주제로 수많은 가지를 뻗어가며 연구 성과를 세상에 내놓았다. 최근 그는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을 주제로 서울, 광주, 구례 등에서 연속 강좌를 했다. 반응이 좋았다.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은 새로운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교계 매체에 보도된 내용으로는 이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다른 이가 아닌, 아함을 꾸준하게 연구해온 이중표 교수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 『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 니까야로 『금강경』을 읽으면 (한문번역과) 어떤 점이 다른가?

“『금강경』은 총 6개의 번역본이 있다. 우리나라는 가장 오래된 구마라집 번역본을 본다. 구마라집은 중국 사람들이 『금강경』을 통해서 무아無我를 깨닫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구마라집 『금강경』은 깨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도에서 『금강경』을 만든 사람들의 취지는 불교의 목적이 개인의 성취, 아라한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서 함께 가는 삶, 즉 보살승에 있다. 구마라집 번역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금강경』의 본래 취지를 흐리고 있다. 이런 취지를 이해하면서 『금강경』을 읽자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설명해달라.

“『금강경』 첫 장면은 부처님이 탁발하고 와서 옷과 발우를 수습하고 발을 씻고 앉는다. 그 이야기가 『금강경』을 이해하는 첫 출발이다. 그때 수보리가 뭐라고 하는가? ‘희유하십니다’ 하고 찬탄한다. 여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금강경』 전체가 잘못 꿰진다. 부처님께서 단순히 옷과 발우를 수습하고 발을 씻었다고 했는데, 니까야를 읽으면 왜 이 장면이 중요한지 알 수 있다.”

 

- 왜 이 장면이 중요한가?

“『맛지마 니까야』 「보디 왕자에게 설하신 경」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박가국의 보디 왕자는 화려한 궁전을 완공하고 부처님을 초대한다. 그는 아무도 밟지 않은 계단에 융단을 깔고 부처님에게 맨 처음으로 오르시길 청한다. 부처님은 융단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왕자는 거듭 청하지만 부처님은 침묵한다. 이를 본 아난다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자여, 융단을 거두십시오. 세존께서는 융단을 밟지 않으십니다. 여래는 가장 낮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부처님은 이런 분이다. 항상 가장 낮은 사람을 바라보며 사신 분이다. 『금강경』 첫 장면은 부처님의 일상에서 이런 뜻을 보라고 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금강경』 첫 장면은 부처님의 일상을 그대로 드러낸 장면이고, 부처님의 일상은 중생의 삶을 살피는 것이며, 부처님이 맨발인 것은 신발이 없어서가 아니라 맨발로 중생의 삶을 함께하기 위함이다. 부처님은 우리들과 보살들에게 그 길을 함께 가도록 가르치고 부촉하신 것이다. 니까야로 『금강경』을 읽으면 부처님께서 보살들에게 가르침을 부촉하셨다는 것과 그 부촉을 받들어서 사람들이 어떻게 머물고, 어떻게 실천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가 쓴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강연을 위한 텍스트에는 보살, 중생, 지금 여기, 아상, 행복 등의 단어가 자주 나온다. 그와의 인터뷰는 4시간이 넘게 진행됐다. 한 가지를 물으면 3~4개의 주제로 번져 나갔다. 부처님의 생애와 초기, 부파, 대승의 불교사가 펼쳐진다. 차를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 오길 두 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 우하 스님과 고익진 교수

고등학교 2학년 때 나주 다보사로 출가했다. “출가하러 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노승이 “우리 절은 가난해 쌀이 없다. 출가하려면 자기 먹을 쌀을 갖고 와라.”고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노승은 당시 천진 도인으로 이름난 우하 스님(1903~1976)이었다. 산을 내려가 장기간 먹을 쌀을 짊어지고 다시 절에 왔다. 그날로 출가를 허락받고 스님을 따라 참선부터 했다. 절 가풍은 결제 해제가 없었다. 일 없으면 참선했다. 무자 화두를 받았다. 하루 지나서 대략 알 것 같았다. 다음 날 스님을 찾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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