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상태바
반야바라밀,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6.29 11:4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대담 월암 스님, 이미령 님

월간 「불광」은 지난 1월부터 육바라밀을 불자들의 수행 지침으로 이야기해 왔다. 이번 6월호에서는 마지막으로 반야바라밀 수행을 제시한다. 반야바라밀 수행은 보시부터 선정까지 다섯 바라밀로부터 얻게 되는 실천의 결과이기도 하며, 또 진정한 시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을 바라밀의 어머니에 비유한다. 이번 대담에서는 반야바라밀 수행을 불자들이 일상에서 어떤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고, 특히 선의 관점에서 반야바라밀은 어떤 의미를 갖고,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에서 월암 스님(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과 이미령 님(불광교육원 전임강사, 전 동국대 역경위원)이 함께 했으며, 사회는 김성동 편집장이 맡았다. - 편집자 주

| 선禪과 반야바라밀 
사회자  오늘 대담은 반야바라밀을 불자들이 일상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를 주제로 마련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반야바라밀은 육바라밀의 마지막이며, 흔히 지혜바라밀이라고 불립니다. 지혜바라밀이지만, 바라밀행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바라밀행이 삶 속에 용해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혜바라밀은 불자들의 삶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선에서 바라밀을 보는 시선은 어떤지를 중심으로 대담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월암 스님  선은 우리 삶 그 자체입니다. 일상의 삶 그대로가 선이 됐을 때가 바로 선의 황금시대입니다. 일상을 떠나서 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달음은 산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行住坐臥語默動靜이기에 어디에도 있습니다. 마음의 안정, 화두의 안정을 좌坐라고 합니다. 좌선의 좌坐란 것이 몸의 앉음만이 아니죠. 일하면서 하는 노동선, 농사지으며 하는 농선, 생활 속에서 하면 생활선이죠. 그런데 정작 우리 선방에서는 여덟 시간, 열 시간, 열 몇 시간 좌선만 하고 있단 말이에요. 지금의 모습은 퍽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요. 

사회자  지금 선방의 수행문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면,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월암 스님  멀리는 경허, 만공, 용성 스님, 가까이는 성철 스님이 봉암사에서 결사할 때만해도 새벽, 아침, 저녁 정진만 가능했지 나머지 시간에는 앉아서 참선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노동선이었죠. 낮에 일하고, 탁발하고, 나무하고 그랬습니다. 세상이 어려우니 절집, 당연히 어렵죠. 지금은 사회가 그만큼 바뀌었고, 절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생산노동에 종사하지 않습니다. 절집이 풍요하니 스님들이 좌선에만 몰두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역으로는 살아있는, 24시간 참구하는 선이 되지 못합니다. 동정動靜이 여일하게 함께 겸수兼修되지 못하고 고요한 정靜만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면 화두가 멀어져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동중수행의 약화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효과가 크게 반감되죠.

이미령  동정 수행이 여여如如하게 이뤄져야한다고 하는데, 사실 보통 사람들에게 쉽지는 않습니다.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주의를 흩트리는 것이니까요. 세속의 많은 사람들은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서 절을 찾고,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앉는 이쪽(禪) 세계를 강하게 열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당신 지금 바쁘게 살고 있는 모습 속에서, 이런 게 선이야.’라고 보여줄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월암 스님  육조 스님은 “성품을 보아서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육조 스님의 정의를 봤을 때는 삶 그대로가 깨어있음으로 갈 때 그것이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만 선정이라고 한다면 입정入定에 들었을 때 선정이고, 출정出定 즉, 정에서 나와 버리면 선정이 아니라는 것인데요. 그것은 제대로 된 선정이 아니지요. 일상생활에 부딪혔을 때 마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들어가고 나옴이 없는 몽땅 그대로가 선정일 때가 부처님의 선정이죠. 반야바라밀도 그렇습니다. 일상을 떠나 바라밀이 있을 수 없습니다. 

| 육바라밀을 성취하는 대승선
이미령  보통 사람들은 선禪이라고 하면 고요한 것, 적막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선이 갖는 이미지 자체가 모든 것을 다 놔버리는 것, 고요한 것, 이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바쁘게 사는 일상, 그 속에서 선을 할 수 있고, 그것이 선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안 받아 들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월암 스님  규봉종밀 스님이 선을 범부선, 외도선, 소승선, 대승선, 최상승선 이렇게 오종선五種禪으로 나눴습니다. 그 중 대승선은 육바라밀을 성취하는 선입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정에서 육바라밀을 성취할 때 대승선이 됩니다. 나와 일체중생이 함께 해탈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혼자 수행하지만 혼자만의 선수행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이 함께 수행하고 있는 거예요. 조용한 곳에서 나 혼자 해탈하려고 참선한다? 그것은 바람직한 대승선이 아닙니다. 

이미령  바깥에서 대중들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새벽부터 건물에서 청소하시는 분들께 “당신의 그 모습이 부처님의 모습이다.” 하면 말이 안 된다고 합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사람들은 직업의 위상이나 급여가 낮죠. 이런 사회적 구조와 불평등 속에 사는 대중들에게 ‘모두가 본래 부처’라는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이것이 숙제가 아닐까요.

월암 스님  우리는 직선화된 가르침, 계급화된 가르침에 익숙하기 때문에 감히 일체중생이 평등하다는 것을 상상 못합니다. 그래서 펄쩍 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뿐만 아니라 보통 절에 다니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죠. “내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말한단 말이죠. 이런 왜곡된 인식, 그걸 깨줘야 해요. 그것이 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인식의 틀부터 틀렸으니까 그 사람들은 아무리 참선해봐야 범부선 밖에 못합니다. 범부를 벗어나는 선이 되지 않아요. 

이미령  그런 사람들이 범부선에 국한된다면 뭐가 안 좋을까요? 범부선에만 만족한다면?

월암 스님  평생 노력해도 다람쥐 쳇바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평생 참선하지만, 꿈속에서 성취할 뿐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꿈을 깨는 것입니다. 꿈속의 성취로 만족하는 것은 선이 아닙니다. 꿈 안에서의 성취를 가지고 자꾸 그걸 찬양 고무하는 것은 선이 아니죠. 방편일 수는 있지만…. 그동안 차제적, 계급적 형식의 틀 속에서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 틀 깨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렵지만 부처님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것과 역대 조사가 진실로 일러주고 싶었던 말이 있단 말이죠. 그것을 깨닫게 해줘야 돼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작업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