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은 어디고 지옥은 어디인가?
상태바
극락은 어디고 지옥은 어디인가?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6.13 12: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空(3)

도인 한 분이 외딴 산속에 혼자 살고 있었다. 도인은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고 늘 말했다. 실직한 거사 한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곳을 찾았다. 산속 그곳에는 차도가 없어 걸어서 가야 했다. 절 입구에 당도하자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마침 입구 바로 옆 대나무 숲에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세파에 시달린 그의 마음까지 씻어 내렸다. 밤이 되니 낙락장송 사이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솟아오르고 맑은 시냇물 소리가 귓가를 즐겁게 했다. 거사는 함께 살기를 간청했고, 도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 열반이 윤회이고 윤회가 열반이다(대승불교)
그곳 하루 일과는 이랬다. 새벽 3시에 기상하여 예불하고, 좌선. 하루 세 끼 식사는 스스로 만들어 먹고, 설거지는 물론 밭에서 야채도 길러야 했다. 마당과 밭에는 웬 잡초가 그리도 많이 나는지. 땡볕에서도 일을 해야 했고, 새벽부터 밤까지 시간에 맞춰 예불하고 좌선하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TV와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으며 말동무할 친구도 없었다.  

한 달 두 달 살아가는 사이, 똑같이 생활하는 도인은 늘 유쾌하게 사는데 거사에게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산사의 그윽한 정취는 어디에도 없고, 뼛속을 저미는 하루 일과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거사는 석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산속을 떠났다. 도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극락이었지만 거사에게는 견디기 힘든 지옥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생활을 했다. 동일한 곳이 도인에게는 극락인데 거사에게는 지옥이다. 그곳이 진짜 극락이라서 극락으로 느껴질까? 또 진짜 지옥이라서 지옥으로 느껴질까? 물론, 아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어떤 곳인가? 극락이라고도 지옥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극락’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이름일 뿐, 그 명칭에 맞는 ‘진짜 극락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누구에게나 극락이고 언제 어디서나 극락이라야 ‘진짜 극락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성’, ‘아我’, ‘실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극락’이라고 불리는 것에는 그 명칭에 부합하는 자성이 없다. 따라서 극락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하다. 지옥도 마찬가지로 공하다. 극락은 어디고 지옥은 어디인가? 당신은 지금 극락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라고 한들 그곳 자체가 극락이거나 지옥은 아니다.

산속의 그곳을 도인과 거사는 각각 극락이라고 하고 지옥이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같은 곳이었으니 “극락이 곧 지옥이요, 지옥이 곧 극락이다.”라고 할 수밖에 없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극락과 지옥 둘 다 공하므로 “극락이 곧 지옥이요, 지옥이 곧 극락이다.” 이처럼 둘은 서로 별개가 아니므로 ‘불이不二’, 즉 “둘이 아니다.”라고 한다.

위의 내용에서 극락과 지옥이 들어간 자리에 열반과 윤회를 대입해도 결론은 똑같다. 열반도 공하고, 윤회도 공하다. 열반이 곧 윤회요, 윤회가 곧 열반이다. 둘은 둘이 아니라서 ‘불이’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공사상을 대성한 용수 보살은 “열반은 윤회와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용수 보살은 “무상한 현실을 바르게 아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한다. 나의 일상생활을 내가 아무리 열반이라고 하거나 윤회라고 해도 그것의 진실한 모습은 그와 무관하다. 열반도 윤회도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열반이나 윤회라고 고집한다면 그것이 바로 무명無明이고 집착이며, 이 때문에 괴로움은 시작된다. 반대로 그것은 열반도 윤회도 아니라고 바르게 알아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이라고 용수 보살은 말하는 것이다. 괴로움의 불꽃이 완전히 꺼져 다시는 붙지 않는 열반과 괴로움 덩어리로 보이는 윤회는 결국 하나의 동전에 대한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용수 보살이 “당신의 삶을 행복하다 할 건가, 불행하다 할 건가?”라고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은 무미건조하다는 말인가? ‘무미건조하다는 것’도 공하다. 따라서 무미건조한 것도 아니다. 당신의 삶은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 없다. 이것이라 해도 틀리고 저것이라 해도 틀린다.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 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