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시대에 맞는 불교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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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시대에 맞는 불교가 필요하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5.01.2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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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불교가 나아갈 방향은 무엇인가-대담 종림 스님, 조성택

지난 100년간 한국불교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제도적 차원의 변화가 특히 눈에 띄게 컸다. 반면 위기설도 끊임없이 제기된다. 대중들은 수시로 한국불교가 이대로 괜찮은지를 묻는다. 그만큼 종단 안팎에서 불안 섞인 시선들이 쏟아지는 상황이다. 21세기의 초입, 한국불교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지성들에게 묻고 싶었다. 이에 답하기 위해 고려대장경 연구소 이사장 종림 스님과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고려대 철학과 조성택 교수를 한 자리에 모셨다. 한국불교 전반에 대한 그들의 생각들을 들어봤다. 

| 조계종, 너는 누구냐?
사회  바쁜 시기에 어렵게 시간을 허락해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최근 불교계 안팎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2014년 월간 「불광」의 40주년을 끝내고 다시 출발선에 서있는 시점에 거시적인 관점으로 한국불교를 이야기해보고자 이번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우선 현 시점에서 한국불교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문제점이나 핵심적인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림 스님  저는 지금까지 선방에 다니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이, 선이 좋다고 하는데 왜 좋은지, 선의 교판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에요. 작금의 한국불교는 하나의 종지로 단일화돼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여러 가지 불교의 모습이 혼합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불교에 들어와 있는 다양한 불교의 모습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만 일관적인 논지를 갖추고 통일된 불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조성택  아마도 스님의 말씀과 제 생각이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는 혼합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전통적으로 한국불교는 여러 불교의 모습들이 혼재되어 온 측면이 있죠. 이것을 통불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 상황은 과거 그 어떤 때보다도 굉장히 다불교多佛敎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종교적인 상황도 있지만 불교 내부만 들여다봐도 매우 다양한 불교들이 들어와서 공존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이 시점에서 조계종은 1,700년 한국불교 역사의 적자 혹은 정통임을 자임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고 있다면, 이제는 이런 다불교적 상황을 조계종 내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가장 필요한 것이 ‘종학宗學’이라고 봅니다. 대체 왜 선이 좋은 것인가? 이것이 정통이라면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정리하는 종학에 대한 개념정립이 필요합니다. 

종림 스님  한국불교에 들어와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불교를 수용할 수 있는 틀이 정 없다면, 차라리 종파를 분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합니다. 정토는 정토대로, 선은 선대로, 티베트는 티베트대로, 남방은 남방대로. 아마 지금까지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회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종림 스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까지는 불교가 유일했는데, 이제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라는 거대한 라이벌이 생겼어요. 기독교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새로 유입됐어요. 시대가 달라진 거죠. 그런 전제 속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고 나아가는 것이 좋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조성택  부처님 시대를 생각해보면 그때도 굉장히 다종교적 상황이었어요. 다종교적 상황에서 다른 것들을 인정하고 판단해가면서 나온 것이 불교이지 않습니까. 불교 자체는 21세기의 다종교적 상황, 다문화적 상황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태생적인 개방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지난 2,600년의 불교사를 생각해보면, 처음 1,600년간은 불교가 얼마나 다이나믹하게 변화해왔습니까. 그런데 지난 1,00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불교가 거의 정체돼 있습니다. 지눌 스님 이후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하지 않았어요. 

종림 스님  1,000년간 잠자고 있다고 하셨는데, 진짜로 그래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올 당시 도교와는 친화적인 부분이 많았으니까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유교와의 관계에서는 좀 고전을 했죠. 유교와의 관계에서 적응해가는 가운데 불교의 창조적 특성이 발휘됐다고 봐요. 특히 유교의 이기理氣론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화엄학이 나옵니다. 이기론이라는 게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이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이理는 원리, 기氣는 재료로 상정하고 풀어내는 사상 아닙니까. 화엄학은 결국 유교의 이理에 대응시킨 학문이에요. 불가능해 보였던 사상의 대응을 해낸 거죠.

조성택  아, 참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게 사사무애(事事無碍, 화엄의 4법계法界 중 하나.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나 그 성질이 서로 장애가 되지 않고, 무한한 관계 속에 얽히고설키며 일체화돼있는 연기緣起를 풀어낸다.)까지 발전되는 것 아닙니까? 동아시아의 사유를 보면 아마도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의 하위에 해당하는 법계. 본래의 성질을 의미하는 본체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서로 걸림 없는 관계 속에서 의존하고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평등 속에서 차별을 보이고, 차별 속에서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의 수준까지는 간 것 같아요. 여기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사무애에서 사사무애로 한 발 더 나아간 겁니다.

종림 스님  그렇죠, 창조를 한 거예요. 저는 한국불교가 아쉬운 게, 조선왕조 50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논의 구조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현재는 조금 나아지긴 했다지만, 지금까지도 그 영향을 받고 있죠. 철학의 논의 속에 불교가 편입돼야 한다고 봐요. 들어가서 우리가 주류의 사상으로 자리 잡는 일을 해내야 해요. 우리끼리만 백날 좋다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불교가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봐야 해요. 지금 우리
가 상대해야 할 것들, 그게 과학일 수도 있고 유태적인 사고, 이원론적 사고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논파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큰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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