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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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에 내리는 눈
  • 만우 스님
  • 승인 2015.01.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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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린포체(수미산) 가는 길 – 하나

 

밖이 환하다. 이른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여니 천지가 온통 눈으로 덮여 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사가saga를 떠나 수미산 코라kora의 출발지인 달첸darchen으로 가는 도중에 시작된 비가 드디어 밤사이 눈으로 바뀐 것이다. 안개, 진눈깨비, 적막, 달첸의 새벽이 환영처럼 다가온다. 지금은 유월이다. 눈은 아직도 내리고 있다.

 

| 폐허 속에 살아남은 신념의 씨앗

수미산을 오르기 전 라싸 주변을 겉돌며 숨을 골랐다. 어느 정도 고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노블링카, 조캉사원, 포탈라궁, 그리고 주변의 오래된 골목들. 사람들은 여전히 마니차를 돌리며 포탈라 궁을 돌고 난뎃사람들은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그들을 담고 있었다. 나도 외지인이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걸음이 빨라진다. 기웃기웃, 포탈라궁 앞 광장을 서서히 가로지른다. 시선 가는 곳마다 살벌한 기운이 넘친다. 광장은 총검이 포위하고 있다. 호위가 아닌 감시의 눈초리다. 광장의 정면은 텅 비었다. 포탈라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한없이 무릎을 꿇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하는 진지한 오체투지의 몸짓은 이미 반역이다. 포탈라궁 광장을 빼앗긴 사람들, 귀퉁이에 절을 하기 위해 펼쳐놓은 자리 한 장이 그들의 착 첼강chag tshal gang–오체투지 하는 언덕–이다. 불온한 어느 곳, 불안한 어떤 시간이 흐르더라도 삶의 모든 고난을 오체투지로 단단하게 다진 그들이었는데 이제 숨어서 울고 숨어서 절한다. 울컥한 마음이 하늘을 향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창탕고원의 하늘빛은 오늘도 푸르고 푸르다.

수미산을 향하는 동안 이 광장의 슬픔과 허무가 사라지지 않았다. 모서리의 삶으로 전락한 이들에게 수미산은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을까. 포탈라궁 문 앞에서 아기를 안고 구걸하던 여인, 염소를 대동하고 같이 사진을 찍으면 돈을 요구하던 저 노인에게 수미산은 몸이 닳도록 엎드리고 고개 숙이면 과연 그들의 모든 고통을 풀어줄 성산일까.

묵직한 무언가가 가슴에 얹힌다. 정면을 상실한 티베트, 풍경이 깊이 잡히지 않고 자꾸 겉돌았다. 이 묵직함이 오는 내내 나의 시야를 흐렸다. 수미산을 돌면 이 묵직함이 사라질까. 가볍게 왔다가 오히려 무겁게 떠나는 것은 아닐까.

달첸이 분주해진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 가까워진 것이다. 진눈깨비는 그칠 줄 모르고 다시 숙소 안으로 들어가 휴게소의 난롯가에 앉아 지도를 펼쳐든다. 벌써 코라 준비를 끝낸 순례객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인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보이고 어제 밤에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던 중국선전에서 왔다는 친구도 보인다. 군복 비슷한 옷을 입은 러시아인들도 눈에 띈다. 러시아 연방 가운데 부랴트 공화국과 투바 공화국이 티베트 불교를 믿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서 티베트를 알았나?’ 목례와 함께 가벼운 의문이 떠오른다.

부랴트 공화국은 유목민들의 가축을 국유화하려는 공산주의 법률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35,000명이 학살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나라다. 이런 역사의 뒤안길에는 폐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폐허 속에 살아남은 신념의 씨앗들이 새로운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 그 향기가 더 멀리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티베트 불교의 세계화는 중국의 티베트 침략과 야만적인 티베트 문화말살 정책으로 인해 이루어진 결과물임을 어느 정도 긍정해야 한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 불리는 달라이 라마는 포탈라를 떠나 비로소 세상의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관세음이 되었고 자비의 빛을 드리우게 된 것이다. 아마 러시아 순례객들도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해 티베트 불교를 접했을 것이고 여기에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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