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속으로 녹여 들인 세상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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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속으로 녹여 들인 세상의 모든 것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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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교의 기초를 다진 전법사, 보양 스님

| 운문사를 중창하다
밀양 표충사에 계시는 무이無二 스님으로부터 『영정사 고적靈井寺古蹟』을 얻어 본 것이 벌써 네다섯 해 전의 일이다. 영정사는 사명대사로 인해 표충사로 바뀌기 전에 불리던 절 이름이었다.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보였다.
“충렬왕 12년 병술년에 이르러 국사 일연一然이 해린海獜을 이어 머물렀다. 뭇 대중 천여 명이 가득 차 법뢰가 크게 떨치니, 충렬왕이 절을 높여 동방 제일의 선찰이라 불렀다.” 
영정사에 네 명의 국사가 머물렀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 세 번째로 일연을 소개한 대목이다. 충렬왕 12년이라면 1286년이다. 이 때 일연의 나이 80세, 실은 3년 전 봄 개성에서 국사에 올랐으나 그 해 가을 고향으로 은퇴하여 어머니를 모셨고,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군위 인각사로 거처를 옮겨 만년晩年을 보내고 있었다. 비문으로만 따지면 일연이 인각사를 떠났다는 기록이 없다. 1289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인각사에 머문 것으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표충사를 다녀갔다는 것일까. 
사실 『영정사 고적』은 아리송한 의문점을 가지고 있다. 지은이와 전승 과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명백히 믿을 만한 안정감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일연보다 앞서 있었다는 해린은 고려 초기의 국사인데, 그가 이 절에 주석했다는 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다. 해린은 해린海麟이라고 쓰는 이일 것이다. 문종 10년에 왕사가 되고, 12년에 국사로 봉해졌다. 왕사가 되기 전이었는데, 가뭄이 심하자 궁궐에서 법화경을 읽어 비가 오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신이한 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는 문종 24년이었다.
일연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290년에는 천희天熙 국사가 이곳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더 이상하다. 천희는 천희千熙 또는 천희千禧라고도 쓴다. 충렬왕 33년에 태어났고, 공민왕 16년 국사에 책봉되었으니, 1290년과는 거리가 멀다. 어쨌거나 일연이 얼마 만큼인지 알 수 없으나 표충사 이전의 영정사에 거처했다는 기록 하나에 주목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일연이 『삼국유사』의 ‘의해義解’ 편에서 꽤 심혈을 기울여 입전한 인물이 보양寶壤 스님이다. 보양과 운문사의 역사를 정리하려 자료를 찾아다닌 일연의 노력은 가긍可矜하다. 
먼저 보양의 전기를 봤는데, 여기에는 출신지와 집안 내력조차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청도군의 관청 자료를 살펴 그 주첩柱貼 공문에, ‘운문산 선원의 삼강전三剛典 주인은 보양화상’이라는 기록을 찾아냈다. 소문 속의 보양이 문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운문산 선원 장승표탑 공문(946),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1161), 진양부첩晉陽府貼(1230)을 살펴, 신라시대 이래 작갑 이하 크고 작은 절들이 있었지만, 후삼국시대의 세 나라가 싸우는 동안 대작갑大鵲岬・소작갑小鵲岬・소보갑所寶岬・천문갑天門岬・가서갑嘉西岬 등 다섯 갑이 모두 부서졌으며, 다섯 갑의 기둥은 모두 대작갑에 모아 두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들이 합쳐져 하나의 절로 중창된 것이 운문사이다. 그 주인공이 바로 보양이었다.
운문사를 중창하기 전, 보양이 당나라에 들어갔다 돌아와서 먼저 밀양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는 대목이 있다. 왜 봉성사인가. 일연은 그 까닭을 재미있는 이야기로 소개한다. 
고려 태조가 동쪽을 정벌할 때 청도에 이르렀는데, 산적들이 견성犬城에 모여들어 교만을 떨며 버티었다. 태조가 산의 아래에 이르러 법사에게 쉽게 제압할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을 타서 움직이지 낮을 틈타지 않고, 앞만 지키면서 뒤를 잊어버리니 마땅히 낮에 뒤쪽을 치라고 일러주었다. 견성에 모인 도적이니 그들을 개와 같은 습성을 지닌 무리로 본 것이다. 
태조는 이 말을 따라서 승리하였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해마다 가까운 현의 세금 50석을 바쳐 향불을 피우는 데 쓰게 했다. 이후 절에는 태조와 보양 두 분 성인의 초상을 걸어 두었다 해서 봉성사라 불렸다. 
봉성사가 영정사 곧 지금의 표충사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출발한 보양은 뒤에 작갑으로 옮겨가 절을 크게 지었는데, 이것이 운문사의 중창이고, 일연 또한 70대 초반 5년 남짓 여기서 주석한 바 있다. 일연이 영정사를 찾았다면 그것은 보양의 행로를 거슬러 가 본 것이다. 보양의 행적을 자세히 알아내 전기를 쓴 일연이었으니 이만한 답사는 필수적이었을 터이다.  

| 용궁에 간 보양 스님
일연이 보양의 삶에서 가장 주목한 것은 그의 전법 행적이다. 봉성사를 키우거나 운문사를 중창한 일도 궁극의 목적은 전법에 있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일연은 설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점도 감수하며 소개한다.     
첫 번째, 서해의 용을 만나는 사건이다. 
보양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 받고 돌아오던 때였다. 서해 바다 속의 용이 용궁으로 맞아들였다. 스님이 경을 외우자 용은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시주하였다. 아울러 이목璃目이라는 아들을 바쳐 시봉侍奉으로 딸려 보내면서 부탁하는 것이었다.
“저번에 세 나라가 시끄러이 싸울 때는 불교에 귀의하는 왕이 없었소. 내 아들과 함께 그대 나라의 작갑鵲岬에 가서 절을 세우고 지내시오. 그러면 도적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몇 년 지나지 않아 반드시 불교를 지키는 현명한 왕이 나와 세 나라를 평정할 것이오.”
말을 마치자 서로 헤어져 돌아왔다. 이는 당연히 무엇인가 상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원광圓光을 만나는 사건이다. 
보양은 지금의 운문사가 세워진 골짜기에 이르렀다. 문득 스스로 원광이라 하는 노스님이 궤짝을 안고 나타나 이를 주더니 사라졌다. 이에 무너진 절을 세우려 북쪽 마루에 올라가 살펴보았다. 뜰에 누런빛의 5층탑이 보여 내려와 찾아보니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 보자 여러 마리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문득 바다의 용이 ‘까치 허구리(鵲岬)’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찾아가 파보았더니 과연 남겨진 벽돌이 셀 수 없이 나왔다. 모아서 하나하나 맞춰보자 탑이 되는데, 남는 벽돌이 없어 비로소 앞 시대의 절터였음을 알았다. 절을 다 짓고 살면서 이름을 작갑사라 했다. 
작갑사가 나중 운문사가 된다. 태조가 세 나라를 통일하여 고려를 세웠다. 보양이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 곧 오갑의 밭을 합쳐 5백 결을 절에 바쳤다. 왕이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현판을 내려주고, 가사의 신령스런 음덕을 받들었다. 937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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