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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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수업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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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 해동용궁사

| 커피를 관문으로, 용궁사 ‘마케팅’
침샘을 다독이며 걷기수업을 계속하고 있노라니 문득 앞서갔던 하지권 사진작가가 커피전문점 앞 키 작은 시멘트 펜스에 걸터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자고 한다. 커피광인 나에게 커피 마시자는 말은 언제나 달콤한 유혹이자 안온한 휴식이다. 하 작가와 나는 커피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커피전문점의 건축 조형미가 예사롭지 않다.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출입구 앞에 세워놓은 투명 아크릴 입간판에 써놓은 소개 글을 보니 부산시가 부산 건축문화 발전을 위해 시행한 2012 ‘부산다운’ 건축상 공모전에서 ‘베스트상’을 수상한 건물이다.(근데 어떤 점이 ‘부산다운’지는 끝내 모르겠다.)
커피점 이름도 ‘끌레 22(cle TWENTY TWO) COFFEE & CAFE’이다. ‘끌레’는 프랑스말로 ‘열쇠’ 또는 ‘관문’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커피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내 삶의 열쇠와 관문을 찾으라는 뜻일까? 아님 커피 한 잔 마시며 다가올 22(TWENTY TWO)세기의 열쇠와 관문을 미리 준비하라는 뜻인가? 나만의 오독吾讀이고 오독誤讀일 수도 있다. 아님 둘 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만의 오독吾讀이고 오독誤讀이면 어떠랴.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지 않았던가. ‘곳곳이 부처님이요, 일마다 부처님 앞에 공양올림’이지 않던가.
한 잔의 커피잔에서 부처님을 보고, 한 모금의 커피에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을 보는 동안 바로 옆 탁자에서 40대 중반의 다섯 여자가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 아무리 막아도 달팽이관을 후비고 들어온다. ‘부산 아지매들’ 정말 시끄럽다. 귀가 멍멍하다. 너무 시끄러워 커피 맛도 제대로 모르겠다. 그래도 높은 산등성이처럼 푹 솟구쳐 올랐다가 급격히 꺾어져 내리는 목소리가 내 ‘하트heart’를 자극한다. 나도 저런 애교 넘치는 여자랑 한번 사귀어봤으면. 
커피 맛에 젖고 부산 아지매들의 수다에 젖는 동안 시간이 훌쩍 갔다. ‘끌레’를 열쇠삼아 다시 해동용궁사로 나섰다. 20분이면 뒤집어쓰고도 남을 길이 두 시간도 넘게 걸리게 생겼다. 아뿔싸, 그런데 길을 나선 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용궁사 ‘마케팅’이 또 나타난다. 이번엔 ‘용궁해물쟁반짜장’ 집이다. 용궁사 마케팅에 따라 내 미각도 한식에서 중식으로, 육류에서 해물로 바뀐다. 구수하게 퍼지는 해물 짜장 냄새가 침샘을 더욱 자극한다. 안 돼. 이럴수록 뒤돌아보지 말고 더 열심히 걸어야 돼. 나는 지금 ‘길을 찾아 길로 나선 길 위의 사람’이지 않은가. 어이쿠, 못된 중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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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고, 마음 있는 곳에 물질 있다
해동용궁사 마케팅은 사하촌에 들어서자 더욱 극에 달했다. 용궁각·해동수산직판장·용궁사 부산 방문 기념선물 부산 명품 손으로 만든 수제 부산어묵·용궁사 대왕소세지·용궁사 씨앗호떡·용궁사 국화빵…. 스마트폰으로 용궁사 씨앗호떡집과 부산 메밀씨앗호떡집 사진을 찍자 ‘맛있는 부산 오뎅’집 아지매가 크게 한 소리 한다.
“스님, 스님도 호떡집 할라꼬예!”.
ㅋㅋ. 즉석 힐링이다. 나도 곧바로 화답한다.  
“네, 저도 호떡집 한번 해보려고요. 스님은 호떡집 하면 안 됩니까?”
“아니라예. 한번 해보입시더.”
모두 폭소가 터진다. 장단지에 바위처럼 붙어있던 노독도 봄눈처럼 녹아내린다. 이것이 바로 걷기수업(만행)만의 재미요, 별미요, 걷기수업만이 주는 몸 힐링 마음 힐링이다.
사하천 노점상 터널을 지나자 비로소 본本 해동용궁사가 펼쳐진다. 본 해동용궁사답게 가는 곳마다 닿는 곳마다 용 그림자요 용 천지다.  
내가 세운 나만의 답사 원칙대로 나는 먼저 빠르게 해동용궁사를 한 바퀴 일별한다. 그런 뒤 다시 한 곳 한 곳 꼼꼼히 되짚어 나가본다. 그런데 아무리 씻어내려 해도 티끌처럼 망막에 자꾸만 걸리는 풍경이 있다. 복전함이다. 용궁에 용보다도 복전함이 더 많이 살고 있다. 마음에서 아무리 밀어내려 해도 밀쳐지지 않는다. 이럴 땐 직접 부딪히고 나가는 것이 최고의 용병술이다. 
나는 해동용궁사 맨 위쪽 해수관음대불부터 시작해 출입구 쪽으로 거꾸로 나아가며 복전함을 헤아려보기로 했다. 해수관음대불 앞에 1개, 용왕단에 1개, 대웅보전 오른쪽 황금포대화상 앞에 1개, 대웅보전 안에 3개, 지하 신비한 약수터 앞에 1개, 용품점 복돼지 앞에 1개, 밤 기도 하는 곳 대리석 약사부처 앞에 1개, 제용단 지장보살 앞에 1개, 학업성취불 앞에 1개, 득남불 앞에 1개, 십이지신상 앞에 각각 1개씩…. 내 눈에 얼른 띈 복전함만 해도 31개나 되었다. 이쯤 되면 해동용궁사는 용의 집이 아니라 복전함의 집이었다.
문득 해동용궁사 도량 맨 위쪽 산비탈에 우람히 서서 수평선을 굽어보고 있는 해수관음대불의 모습이 퍽 처연했다. 내 마음도 따라 처연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 떡. 그 처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부신 싱글 젊은 서양미녀가 살살 녹는 미소로 해수관음대불 앞에서 나에게 용감하게(?) 사진 한방을 부탁한다. 옳거니, 원, 투, 쓰리- 찰칵. 한 번 더 원, 투, 쓰리- 찰칵. 카메라 앵글에 붙잡힌 긴 금발과 늘씬한 허리와 시원한 눈망울과 백옥 미소를 내 마음 카메라에도 함께 담는다. 그래도 걸림은 가시지 않는다. 
그래. ‘해가 제일 먼저 뜨는 절’도 좋고 ‘한 가지 소원을 꼭 이루는 해동용궁사’도 좋고 ‘천하대명지 일도만복래(天下大明地 一到萬福來, 천하에 제일가는 명당의 터로, 한 번만 기도해도 만복을 받는 절)’도 다 좋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 있고 마음 있는 곳에 물질 있다’는 말도 틀림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도량 곳곳을 복전함으로 온통 설치미술을 해놓은 건 좀 과하지 않았을까? 이웃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한한 절집 살림 탓이라고 백보 양보해보지만 내국인은 물론 ‘부산 관광 필수코스’로 들리는 외국인들에게 너무 상업적이고 불온한 ‘한류’로 비춰지진 않을까 걱정이 먼저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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