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빼고 하는 진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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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빼고 하는 진짜 불교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11.0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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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홍법사 주지 심산 스님

| 가피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일
그날따라 어머니는 유난히 엄하셨다. 멋모르고 여름성경학교에 갔다가 어머니께 눈물이 푹 나도록 혼이 나고 말았다. 중학교 때 불교학생회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간 울산 해남사. 햇살이 따숩게 내려앉은 대웅전 앞마당 향나무 그늘 아래서 알 수 없는 평화를 맛봤다. 일생을 두고 잊히지 않는 풍경과 정취였다. 그 뒤로 영남불교연합회 여름수련대회 수계식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도문 스님을 만난다. “출가하고 싶은 사람 손들라.” 들고 보니 혼자였다. 그해 겨울 동국대 선학과에 합격해 놓고 그 길로 도문 스님 문하에 출가했다.
“처음에 어머니가 만약, 한번 가보기나 해라 이렇게 얘기를 했었다면 아마 지금쯤 어디 있을까요? 어느 교회나 성당에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죠.”
인연의 끈은 일찍부터 심산 스님을 전법의 길로 이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스물셋의 심산 스님에게 은사스님은 서울 서초동 대성사 주지를 맡겼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못합니다.” “해야 된다.” “안합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티다 주지를 살았다. 2년 뒤, 공군 군법당 중에서 가장 일이 많은 교육사령부에 군법사로 발령이 났다. 밤새워 자료를 만들며 일주일에 7~8차례 법문했던 치열한 시간들. 돌이켜보면 그것은 ‘연마’였다. 전역 후에는 통도사 강원에 방부를 들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심산 스님의 진가가 드러나는 작은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날 공양시간이었어요. ‘옛날에는 돌림법문이라는 게 있었는데 요즘에는 왜 안하는지 몰라?’ 월하 방장스님 말씀이니 어쩌겠어요. 강원생들이 죽통을 흔들어서 법상에 올라갈 사람을 뽑았죠. 마침 거기에 걸린 거예요. 선방스님, 사중스님들하고 선원장스님에 방장스님까지 스님들만 백삼사십 분 계신 데서 법문을 하고 내려왔는데 본의 아니게 스님들 사이에 평이 돌게 됐죠. ‘음, 군법사 하고 오니까 좀 다르네.’ 그 일로 주지스님 눈에 띄어 나중에 통도사 부산포교원의 책임을 맡게 되지요.”
통도사 부산포교원이 문을 연 것은 1993년 5월의 일이다. 서른을 갓 넘긴 심산 스님의 전법 열정은 뜨거웠다. 금강경산림을 열고 다라니기도를 하며 점차 사세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역경은 복병처럼 예비 되어 있었다. 건물을 무상임대해준 건설사가 채 5년도 못되어 부도를 냈고, 이후 삼사년이 걸린 공개입찰은 스님의 계획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천 명의 신도를 이끌고 간 사직동 법원 청사에서 심산 스님은 처음으로 신도들 앞에 눈물을 보였다. 부산포교원을 떠나던 날, 스님에겐 짐이랄 것도 없었다. 허탈한 심정을 안고 지금의 홍법사 자리인 농장으로 들어왔다. 2002년 5월이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서라 했던가. 해가 바뀌도록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농장의 관리사를 개조해 조그마한 관세음보살 원불을 모신 임시법당에서 동지기도를 시작했다. 곧바로 이어 다라니기도를 입재했다. 작은 관리사와 비닐하우스 임시법당을 얼기설기 증축해가며, 불편함을 감수하는 신도들과 한마음이 되어 법회를 했다. 농장주 도명화 보살님이 1만 5천 평 농장 부지를 시주했다. 평생 모은 전 재산이었다. 대웅전을 짓기 시작한 2008년, 하늘이 감읍한 듯 그해 여름 장마도 태풍도 없었던 것은 말 그대로 가피였다.
“비가 와도 밤에 조금 오다가 아침 되면 그쳐요. 공사를 하고 있으면 요 앞 개울 건너까지만 오고 여긴 안 왔지요. 기공식 한 지 세 달도 못되어 상량식을 했습니다. 이게 가피구나, 뼈저리게 체험했어요. 불사佛事는 철저하게 부처님이 해주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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