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을 견디는 이음새를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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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견디는 이음새를 짜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9.0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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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열展 - 길 위에서 길을 찾다 | 불교문화지킴이 | 한국고건축박물관 전흥수 대목장

절 마당을 박차고 일어나 길을 떠났다. 세상을 향한 출가出家, 고요한 사중의 길을 뛰쳐나와 그 발로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수의 길을 걸었다. 정진하는 마음으로 천 년의 세월을 이어갈 도량을 짓는 대목장大木匠 전흥수(77. 중요무형문화재 74호) 선생의 이야기다.
나무를 배우고 기술을 닦아 수많은 전법의 도량을 빚어내며 우직하게 외길 인생을 걸어온 전흥수 대목장. 대목장이라는 무게처럼 그의 마디마디 말 속에는 굵직한 기둥이 뿌리깊이 세워져 있었다.

| 깊고 깊은 부처님과의 인연
“절하고는 아주 인연이 깊지. 내 마음 속 뿌리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늘 절에 있어.” 
대목장으로 부처님 모실 자리를 짓는 사람이 되려면 도대체 얼마나 깊은 인연을 가져야 하는 걸까. 그와 마주 앉아 그가 살아온 인생이야기를 듣다보니 그에게 절이 왜 ‘마음 속 뿌리’인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는 만공 스님의 유발 상좌였고, 어머니 또한 평생을 절에서 살다시피 했다. 8・15 광복과 6・25 전쟁을 겪으며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목수인 아버지가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9남매의 주린 배를 채우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식이 밥이라도 잘 먹고 살길 바라는 마음으로 13살 나이의 그와 그의 동생을 수덕사에 맡겨 스님이 되길 바랐다.
“아버지 손에 이끌려 간 수덕사에서 행자 생활을 시작했지. 그런데 승려 생활도 팔자에 타고나야 하지 억지로는 못하겠더라고. 나는 집에 가고 싶었어. 성격이 불같아서 한 열 번 넘게 도망 나왔지. 그 때마다 아버지가 붙잡아서 데려 오고, 또 도망가면 스님에게 붙들려 오곤 했어. 동생은 참 고집이 대단했지. 동생은 그 길로 출가를 하더군.”
캄캄한 밤에 수덕사에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집에서 빛나는 호롱불이 보이고, 소쩍새가 울면 곁에서 함께 우는 것만 같아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집에도 가고 싶고 큰스님의 호통도 싫어 막무가내로 절에서 뛰쳐나오기를 여러 번, 그는 4년 만에 결국 행자 생활을 그만두고 말았다. 함께 입산해 그 길로 출가했다던 동생은 바로 수덕사 방장 설정 스님이다. 그와 절, 그와 부처님과의 인연은 깊고도 깊었다.
열여섯 나이에 절에서 뛰쳐나왔으니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가난이 싫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다짐하며 서울로 올라가 궂은일 마다않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었지만,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 밑에서 한식韓式 건축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기술이 참 좋았어. 뭐든지 한번 보면 만들어 내셨지. 그런데 아버지의 제자는 될 수 없는 게 자식이더라고. 그게 잘 안 돼. 아버지가 뭐라고 하면 한 자도 안 배웠어.”
한참 혈기왕성한 시기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의 말을 잘 듣지는 않았지만 재능은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1955년, 당시 수덕사 아래에 대목장으로 터를 닦고 있었던 故김중희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고건축에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기 밥줄 뺏긴다고 직접 일을 가르쳐주지 않아 어깨너머로 배우고 밤늦게 익히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빠른 학습 능력 덕분에 선배들의 시기와 질투로 방해를 숱하게 받기도 했다. 허나 무엇도 그를 꺾을 수는 없었다. 방해를 받으면 더 꼿꼿하게 맞서 싸우기를 수차례, 그렇게 10년 만인 1965년 전남 순천 한산사 대웅전을 도목수로 보수하게 됐다. 10년만의 독립은 건축계에서 이례적으로도 빠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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