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를 오가는 수레엔 경제와 함께 종교도 실렸다. 불교의 중국 전래시기에 관해 예닐곱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이존伊存의 불교구수설佛敎口授說’이 보편적이다. 기원전 2년 경로景盧라는 자가 당시 인도 쿠샨왕조의 사신이었던 이존에게서 ‘부도교浮屠敎’를 전해 들었다는 내용이다. 1998년 중국불교협회는 불교유입 20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반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 설’은 신화적이다. 서기西紀 67년 어느 날 밤 명제는 꿈에서, 하늘에서 궁궐로 내려오는 금인金人을 봤다. 금인을 통해 불교의 존재를 알게 된 명제는 신하 18인을 서역으로 보내 불상과 경전을 구해오도록 했다. 이후 중국불교는 황제의 모범과 장려 아래 전국에 ‘금인’을 마구 세우는 형식으로 유행했다.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은 대표적인 위경僞經이다. “노자가 원래 부처님이었으며 그가 오랑캐 땅인 인도에 들어가 교화했던 기록이 바로 불교”라는 줄거리다. 책의 저술과 유포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 저자는 왕부王孚라는 인물로 도교의 사제였다. 곧 도교가 불교의 원조이며,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한 탐욕의 산물이다. 해탈과 초월을 권하는 이념적 동질성에서 비롯된 아전인수이기도 하다. 유교는 충직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내 아직 삶을 다 알지 못했는데 죽음을 알아서 무엇하리요”라는 공자孔子의 능청에서 보듯,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젬병이었다. 반면 극락과 장생長生을 속삭이는 불교와 도교는 오래도록 치열한 경쟁관계를 형성했다. 황제의 편애는 전황戰況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불교에 취한 황제는 도교를 폐했고, 도교를 탐한 황제는 불교의 대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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