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불안하면 헛것이 보이고 조금 더 불안하면 유일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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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안하면 헛것이 보이고 조금 더 불안하면 유일신이 보인다
  • 불광출판사
  • 승인 2014.02.0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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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인 金人

실크로드를 오가는 수레엔 경제와 함께 종교도 실렸다. 불교의 중국 전래시기에 관해 예닐곱 가지의 설이 있는데, ‘이존伊存의 불교구수설佛敎口授說’이 보편적이다. 기원전 2년 경로景盧라는 자가 당시 인도 쿠샨왕조의 사신이었던 이존에게서 ‘부도교浮屠敎’를 전해 들었다는 내용이다. 1998년 중국불교협회는 불교유입 20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렀다. 반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 설’은 신화적이다. 서기西紀 67년 어느 날 밤 명제는 꿈에서, 하늘에서 궁궐로 내려오는 금인金人을 봤다. 금인을 통해 불교의 존재를 알게 된 명제는 신하 18인을 서역으로 보내 불상과 경전을 구해오도록 했다. 이후 중국불교는 황제의 모범과 장려 아래 전국에 ‘금인’을 마구 세우는 형식으로 유행했다.

기복祈福은 신앙의 본의는 아니지만 본질이다. 불교가 도래하기 이전 중국인들에겐 특별한 내세관이 없었다. 그래서 ‘육체는 썩어도 영혼은 소멸하지 않으며, 착한 투자는 착한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윤회와 인과응보의 논리는 자못 충격이었다는 전언이다. 그들에게 부처님은 신神이었으며, 최후의 심판 앞에서 당당하려면 부지런히 공덕을 지어야 했다. 다음 생에서도 혹은 다음 생에서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며, 불상을 만들거나 불상을 만들 돈을 댔다. 돈이 없는 자들은 불상 앞에 바짝 엎드리며 몸으로 때웠다. 참된 종교는 교리가 합리적이고 구세救世가 지속적이다. 그러나 교리는 너무 어렵고, 사랑보다 싸움이 먼저 오는 게 현실이다. 결국은 교조의 신성성이 포교의 속도를 좌우하기 마련이다. 아울러 부처님보다 있어 보이는 게 금으로 번쩍이는 부처님이고. 물론 황금이란 깨달음 보다는 욕망이나 권력과 더 가까운 상징이다.
극단적인 전제군주체제에서 황제의 불교에 대한 호불호는 교단의 명운을 좌우했다. 세속적 절대자의 비위를 맞추는 최선의 방법은 그를 종교적 절대자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특히 불교는 외래종이라는 핸디캡을 지녔다. ‘황제가 곧 부처’라는 이데올로기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남북조시대는 이민족의 침략으로 시작된 역사이며, 왕조의 수명이 채 반세기를 가지 못하던 혼란의 역사였다. 황제는 영원한 권력을 꿈꾸며 불사를 일으켰고, 귀족들은 사사私事를 짓고 사승寺僧을 키우며 권력에 분칠을 했다. 북조를 최초로 통일한 북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는데, 오래지 않아 도시는 3분의 1이 사찰로 채워졌다. 영녕사永寧寺에는 높이 1,000자에 달하는 9층탑이 있어 100리 밖에서도 볼 수 있었으며, 불전에는 금불상 3,000구가 번들거렸다. 국가재정은 바닥나고 백성들은 노역에 지쳤지만, 그들은 한사코 금인이 되고자 했다.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은 대표적인 위경僞經이다. “노자가 원래 부처님이었으며 그가 오랑캐 땅인 인도에 들어가 교화했던 기록이 바로 불교”라는 줄거리다. 책의 저술과 유포는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 저자는 왕부王孚라는 인물로 도교의 사제였다. 곧 도교가 불교의 원조이며,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강변하기 위한 탐욕의 산물이다. 해탈과 초월을 권하는 이념적 동질성에서 비롯된 아전인수이기도 하다. 유교는 충직한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내 아직 삶을 다 알지 못했는데 죽음을 알아서 무엇하리요”라는 공자孔子의 능청에서 보듯, 죽음 이후의 문제에 대해서는 젬병이었다. 반면 극락과 장생長生을 속삭이는 불교와 도교는 오래도록 치열한 경쟁관계를 형성했다. 황제의 편애는 전황戰況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불교에 취한 황제는 도교를 폐했고, 도교를 탐한 황제는 불교의 대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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