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불교를 만드는 명품 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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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불교를 만드는 명품 불자
  • 불광출판사
  • 승인 2011.11.07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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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인터뷰/서강대 물리학과 박광서 교수

한국불교가 반 세기의 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고들 한다. ‘자성과 쇄신 결사를 비롯해 화쟁위원회출범, ‘불교사회연구소설립 등을 통해, 청정한 사부대중 공동체를 가꾸는 동시에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대사회적 활동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태동한 것은 아니다. 불교계 곳곳에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대안제시, 실천적인 활동들이 이뤄졌기에 가능하다.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 중흥의 방향성을 만들기까지, 재가운동이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재가가 승가보다 사회와 더 밀접하게 교류하니, 반응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불교의 위상이 추락하고 해방 이후 기독교 중심의 국가가 되어가는 것을 보며,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재가불교운동의 중심축을 이끌어온 이가 있으니, 바로 재가운동의 산증인인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박광서(63)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다
.

귀신도깨비가 맺어준 불교와의 인연
박광서 교수가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이던 60년대 중반, 소설 원효 대사를 통해서다. 원효 대사가 산 속에서 귀신도깨비를 만나는 장면에서 깊은 충격을 받고 불교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분법적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며 선과 악, 죽일 놈 살릴 놈, 내 편 네 편 등 편 가르기와 패거리문화가 심했습니다. 귀신도깨비는 빨갱이 즉 북한의 상징처럼 묘사되는 시대였기에, 무조건 나쁜 놈, 죽일 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원효 대사가 귀신도깨비와 함께 낄낄대며 웃으면서 춤을 추는 거예요. 그때, ‘, 불교엔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를 직감적으로 깨달았죠
.”
이후부터 불교서적을 탐닉하게 되고, 고등학교 시절 불타사상연구회를 결성해 불교 공부에 심취하게 된다. 가슴 속엔 서서히 출가의 꿈이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전국적으로 서로 절을 차지하겠다며 스님들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출가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겠다 싶었다
.
그리하여 출가시기를 늦추고, 현대인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현대 학문을 하나 공부해보고 머리를 깎겠다는 원력을 세운다. 우리의 전통사상과 문화가 서구사상에 휘둘리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서구를 강하게 만든 본질을 과학물질문명에서 찾고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브라운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숭산 스님께 출가의 마음을 냈지만, 끝내 출가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
자신이 없었던 거죠. 인연에 맡기는 심정으로 서울대와 동국대에 교수 임용 이력서를 냈는데, 엉뚱하게 서강대에서 연락이 와서 83년부터 둥지를 틀게 됐습니다. 당시만 해도 재가운동이 일천했어요. 재가불자가 기복적인 신심으로 절에 다녔지, 사회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건 부족했지요. 그래서 재가운동의 중요성을 느끼고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
그는 제일 먼저 사회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며, 1988년 교수불자연합회를 결성했다. 이후 1991년 소위 재가신행결사단체인 우리는 선우를 태동시켰으며, 1999년 불교바로세우기재가연대를 결성해 교단 자정 활동을 펼쳤다. 2년 후 참여불교재가연대로 명칭을 바꿔, 교단 자정 활동과 함께 불교 교육 및 연구, 시민사회 및 종교간 연대 사업 등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현재는 종교자유정책연구원 공동대표 및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으로서, 종교인권의식 확대와 종교평화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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