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불교] 3. 정교한 현교의 교학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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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불교] 3. 정교한 현교의 교학 체계
  • 지산 스님
  • 승인 2010.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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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불교와 수행법 / 티베트 불교 3
▲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내부에 불교 경전을 넣거나 겉면에 불경을 새긴 마니차를 돌리면, 불경을 한 권 읽는 공덕이 쌓인다고 여긴다.

불교에는 신(信: 믿음), 해(解: 이해), 행(行: 수행 또는 실천), 증(證: 증득 또는 깨달음)이라는 말이 있다. 이 중에서 신, 해, 행은 마치 솥의 세 발처럼 또는 사진기의 삼각대처럼 상호 보완하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상호 보완하여 궁극적 목표인 증득에 이르게 한다. 이 중 해(解: 이해)와 연관된 부분이 불교의 교학인데, 교학을 잘 공부함으로써 정견(正見)을 가지게 되고, 정견은 다시 올바른 믿음과 수행을 낳는다. 반대로 교학을 공부하는 과정이 허술하면 정견을 갖기 어렵고, 이는 다시 그릇된 믿음과 잘못된 수행을 낳는 악순환을 되풀이하도록 만든다.

교학의 전래와 논쟁

티베트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7세기 송첸감포 왕 때이지만, 본격적인 교학이 전래된 것은 티송데첸 왕이 초청한 인도의 학승 산타라크시타(寂護)가 티베트에 들어간 서기 770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산타라크시타는 인도 나란다 대학의 학장이었으며, 인도 내에서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는 대논사(大論師)였고, 유식중관학파(唯識中觀學派)의 거두(巨頭)였다. 따라서 이 산타라크시타와 당시 인도의 대성취자였던 파드마삼바바에 의해 시작된 티베트 불교의 고파(古派)인 닝마파의 교학적 관점은 유식중관이었다. 유식중관이란, 나가르주나(용수)에 의해 시작된 중관학파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학파로 분파되는데 그 중에서 유식철학의 관점에 의해 모든 현상의 공성(空性)을 주장하는 학파이다.

티베트 불교사의 초기에 가장 큰 분수령이 된 사건이 삼예의 논쟁(서기 794년)이다. 인도에서 전래된 금강승과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의 관점이 크게 달라 갈수록 충돌과 갈등이 커지니, 당시의 티베트 왕 티송데첸은 삼예 사원으로, 금강승을 대표하는 산타라크시타의 제자 까마라실라와 선종을 대표하는 마하연을 초청하여 자신의 앞에서 논쟁을 벌이도록 한다. 이 논쟁은 금강승과 선종의 논쟁이면서 동시에 점수와 돈오의 논쟁이기도 한데, 결과는 까마라실라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이때부터 티베트 내에서는 선종의 포교가 금지되었고 닝마파의 관점이 교학의 본류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닝마파는 타락의 양상을 보였다. 이는 교학의 문제는 아니고 주로 잘못된 밀교 수행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밀교 수행자들을 멸시하고 배격하였으며, 밀교 수행자들 중에는 계율과 교학을 무시하면서 살생을 일삼거나 성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도적(邪道的) 수행자들이 많아져 갔다.

티베트 불교를 완성시킨 총카파 존자

이런 어지러운 시대에 티베트 불교에 정화의 바람을 일으킨 분이 인도에서 오신 아티샤(982~1054)이다. 인도 비크라마실라 대학의 좌주(座主)였던 아티샤는 티베트 서부 구게 왕국의 왕 예세외와 장춥외의 초청으로 티베트에 와서 올바른 금강승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소승의 계율을 지키면서, 대승 공관(空觀)의 이치를 배우고, 밀교의 수행 방법에 따라 깊이 있게 증득한다.’ ‘반야의 지혜를 얻는 일과 이타의 방편을 구하는 일은 둘이 아니다’라는 두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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