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세계문학] 불교와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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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세계문학] 불교와 영문학
  • 김구산
  • 승인 2007.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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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세계문학[1]

  [1]

  서구문명이 최초로 인도문명과 접촉한 것은 BC 320년 알렉산더 대왕{大王}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B C 327년 인도의 서북부에 침공하여 약 2년 간 판쟈브지방을 정복하고 퇴각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희랍과 인도문화가 융화된 것은  BC 2세기에 인도의 서북부에 박트러아{Bactia}국을 건설하여 희랍의 왕조{王朝]가 등장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왕은 밀린다{Milinda}왕이며 그가 불승{佛僧} 나가세나{Magasena}에게 불법{佛法}을 물었던 것은 [밀린다 왕문경{王問經}]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BC I세기경 간다라{Gandhara}를 중심으로 등장한 불화{佛畵} 및 불상 조각에서 희랍조각의 영향을 발견하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융화의 증거가 된다.

  그러나 같은 시대에, 불교를 포함하여 인도 사상이 희랍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당시 희랍에는 고도한 철학의 학파{學派}가 성립되어 소크라테스 이후로 플라톤이며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사상이 확립되어 있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소포클레스, 아이스큘러스, 유리피데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 등이 성숙한 문학의 전통을 이룩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이후 로마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명의 팽창은 강력하게 유럽을 석권했으며, 기독교는 그 성질상 배타적일 뿐만 아니라 AD 395년 데오도리우스 대제에 의하여 국교{國敎}로 지정된 이후로는 일체의 사상적 이단성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타의 사상에는 정신적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세{中世}를 역사상 암흑시대라고 부르게 되었고, 기독교만이 사상적 획일성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서구{西歐)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을 품고 모험에 정열을 쏟게 되었다. 그들에게 인도는 단연 신비의 보고{寶庫}였다. 콜롬부스가 우연히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지만 그가 목적지로 정한 곳은 인도였고 그가 도착한 곳 역시 인도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동남부 제도 {諸島}를 서{西}인도제도라 부르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印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인도가 눈앞의 현실로 드러난 것은 서구{西歐} 제국이 식민지 팽창정책을 추구하는 가운데 1600년 영국이 인도에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을 설립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인도의 문물이 구체적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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