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해온 세월, 불광원 그리고 월간 「불광」

불광을 사랑하는 사람

2007-12-11     관리자

가을햇볕이 좋은 오늘 같은 날은 고추 내어 말리기에 좋은 날이다. 연일 내린 비로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말렸는데, 넓은 앞마당에 빨간 고추를 펼쳐놓고 보니 마음 가득 부자가 된 것 같다.
천마재활원(정신지체 생활시설, 부산 서구 암남동) 가족들과 함께 이곳 불광원(경기도 안성군 죽산면 당목리)에 들어와 농사를 짓기 시작한 지도 벌써 12년째가 된다. 1996년 6월, 천마가족 중 결혼한 부부 2쌍과 20대 청년 4명, 어린아이 2명이 이곳 불광원에서 한 가족처럼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로 한 것이다.
60생을 보낸 부산생활을 접고 이곳 불광원으로 들어온 것은 광덕 스님과의 인연 덕분이다. 스님은 “천마재활원 가족들이 비록 정신지체를 앓고 있지만 그 영혼은 맑은 사람들이니, 도심에만 있게 하지 말고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서 생활하며 자활을 시켜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며, 당신이 말년에 머무시던 이곳 불광원을 천마재활원에 선뜻 내어주셨다.
그런데 평생을 의사로 생활한 나를 비롯해 가족 구성원 누구 하나 제대로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이 없었기에 첫 해는 동네 분들께 귀동냥한 대로 고추농사부터 지어보았다. 30cm 간격으로 고추모종을 심고, 어느 정도 키가 자랐을 때에는 지지대도 매어주며 정성을 드린 덕분에 50근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처음해본 농사치고는 큰 수확이었다.
한 해 두 해 농사짓는 법을 익혀간 덕분에 이제는 제법 노하우도 생겨, 지금은 700근에서 800근의 고추를 수확한다. 천마 가족들이 먹고 남는 것은 판매해서 천마재활원 운영에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있다. 작물의 종류도 한 가지 두 가지 늘기 시작해 올해는 주 작물인 고추를 비롯해서 배추, 무우, 감자, 고구마, 호박, 파, 들깨 등을 재배했다.
불광원 가족들이 농사를 짓는 덕분에 150명 천마가족의 1년 기본 부식은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정신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는 바로바로 보람과 성취감을 주는 재배작물이 좋다. 특히 고추는 심고, 거둘 때까지 그 모양과 빛깔들이 눈에 들어와서 더할 나위없는 작물 중에 하나다.
이곳 죽산면 당목리에 살고 계신 분들도 불광원 가족들을 한 가족처럼 여기며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다. 영농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들에게 영농에 대한 정보와 기술을 전해주셨고, 트랙터를 비롯한 장비를 몸소 운전하면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있으시다.
요즈음같이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계절이면 새벽안개 자욱한 그 속에서 광덕 스님이 걸어오시는 모습을 환상으로 볼 때가 있다. 스님께서 열반하시기 두 해 전 이맘때쯤이다. 화창한 가을, 떡 한 소쿠리와 사과 한 상자를 마루에 남겨두시고 가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인자하신 얼굴 표정, 맑으신 눈매하며 모두가 옛날이나 다름이 없는데 떨어진 기력으로 힘없이 걸으시는 스님을 부축하는 손이 안쓰러웠다.
평생회원이 되어 월간 「불광」을 보아온 지도 벌써 33년이 된다. 33년 전 스님이 창간하신 「불광」이 지금도 매월 반가운 도반처럼 찾아와주니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며,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스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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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무 _ 신경정신과 의사로 20여 년간 환자를 돌보는 한편, 1960년 부친이신 고 황명규 선생이 설립한 정신지체 생활시설인 천마재활원을 아내 박근련 원장과 함께 운영해왔다. 개업의사로서의 생활을 접은 지금은 경기도 안성 불광원에서 천마가족들과 공동생활가정을 이루어 행복한 농사짓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