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린다왕문경의 세계] 물체와 실체

미린다왕문경의 세계

2007-12-04     권탄준

  실체란 생멸변화하는 여러 현상 [일, 또는 물건] 속에서 항상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을 유지하는 불변의 본체{本體}를 말한다. 즉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성질, 상태, 작용 등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현상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이 실체의 개념은 본래 현상을 어떤 원리에 의해 형이상학적인 체계로써 파악하려는 입장에서 비롯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에서 말하는 세계원질설{世界原質說}, 유설{有說}, 원자설{原子說}, 이데아설{Idea說} 그리고 인도의 전통사상인 아트만설{Atman說}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이 발달하면서 현상을 실체론적으로 파악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이 타파되거나 근본적인 변동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세계에서는 현상을 형이상학적인 어떤 원리에 의해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 그대로 파악하려는 경향이 절대적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에 유행하고 있는 현상학, 형태론, 구조주의 이론 등의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상을 실체론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 (加實하게) 파악하는 불교의 입장과 너무도 흡사하다. 불교에서는 모든 현상을 제법{諸法}이라고 하여 [제법에는 실체가 없다(諸法無我)]고 보는 것이 근본 입장이다. 모든 일이나 물건은 상호작용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서, 그것에는 고정불변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고 본다.

  이 미린다왕문경에도 [제법무아]에 대한 쉽고도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는데, 편의상 몇 가지로 나누어 알아 보기로 하겠다.

  [1] 실체란 없다

  우리가 수레라고 할 때 [어떠한 것이 수레다] 라고 단정적으로 주장을 내세울 수는 없다. 수레라 하는 것은 단지 빈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수레는 수레채, 굴대, 바퀴, 차체, 차틀, 밧줄, 멍에, 바큇살,  채찍 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반연{綠}하여 수례라는 명칭이나 통칭{通稱}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사람을 ㅇㅇ이라고 할 때 거기에서 인격적 개체 [육체 속에 있는 영원불변한 것]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 부분이 합하여서 수레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바와 같이, 사람도 33가지 유기물과 존재의 5가지 구성 요소[五蘇}를 반연하여 ㅇㅇ이라는 명칭이나 통칭이 생기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어떠한 사물에 있어서도 실체란 존제한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2] 영적{靈的}인 인격적 개체도 없다

  만일 사람에게 인격적 개체 [영혼이나 정신적 자아]가 없다면 무엇이 형상을 보고,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촉감을 느끼고, 사물[法]을 식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된다. 이에 대하여 미린다왕문경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약 사람의 몸 안에 인격적 개체가 있어서 집에 있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듯이, 5개의 감관을 통해 사물을 식별한다고 하자. 창문을 모두 열어젖히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큰 허공을 본다면 모든 대상을 보다 분명히 볼 수 있듯이, 눈의 문이 제거될 때 몸 안에 있는 인격적 주체는 모든 대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볼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감관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감관의 문이 제거되어 버린다면 어떤 것도 식별할 수가 없다. 눈과 형상[色]에 의하여 눈의 식별 작용이 생기고, 그밖에 접촉[觸]과 감수{感受}와 표상{表象}과 의사{意思}와 통일작용{抽象}과 생명감과 주의력 등이 함께 생긴다.

  그리고 이것들과 유사한 인과{因果}의 연속은 감각 기관이 작용하게 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모든 법{法, 일이나 물건]은 연{緣}을 따라 일어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을 가진 인격적 개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3] 윤회의 실체도 없다

  불교에서는 사람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한편 영혼이나 인격적 개체가 없다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설명을 보기로 하자. 타고 있는 등불{燈]로 다른 등에 불을 붙인 경우, 등이 다른 등으로 옮겨간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윤회의 주체는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난다. 또한 누가 어렸을 때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하고 있다 하자. 그 시는 스승으로부터 그 사람에게로 옮긴 것이 아닌 것처럼 몸이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난다.

  이번에는 무아설{無我說}과 윤회설의 근본적인 모순점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가 알아 보기로 하자. 미린다왕문경에서는 죽는 자와 다시 태어나는 자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하면서 두 가지 설이 모순되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갓난아이였을 때와 어른이 되었을 때에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과 같고, 등불을 켰을 때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새벽에 타는 불꽃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과 같고, 또한 금시 짠 우유가 얼마간 후에는 굳은 우유가 되고, 다음에는 버터가 되고 그 다음에는 버터기름으로 변해 갈 때, 우유가 굳은 우유나 버터나 버터기름과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과 같다. 인간이나 사물의 연속은 꼭 그와 같이 지속된다. 생겨나는 것[生]과 없어지는 것[滅]은 별개의 것이나 서로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지속된다. 이리하여 존재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면서 마지막 단계의 의식까지 지속된다.

  [4] 무아사상의 배경

  불교에서는 이 세계 안의 모든 존재는 생,주,이 ,멸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기본 요소인 사대{四大} 오온{五蘊}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하나라도 항구불변하는 것은 없다. 부처님께서 [형태를 이루는 인과 연이 이미 무상하니, 무상한 인과 무상한 연으로 발생한 형태가 어찌 유상[有常]하겠는가]라고 잡아함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근본요소가 고정불변하지 않는 무상이기 때문에 우주만물이 모두 무상한 것이다. 모든 것이 생성,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고정불변의 실체란 근본적으로 있을 수가 없으며, 오직 현상적인 관계성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미린다왕문경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갑자기 생겨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고,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개체형성작용은 없다. 개체형성작용은 발전과정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으로 미린다왕문경에 나타난 무아사상에 대해 간단히 살펴 보았는데, 불교의 이러한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부처님께서는 [자신에 의지하고 법[法]에 의지하라] 하셨고, 또한 [나의 주인은 나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불교학, 동국대 대학원)